책을 되새김질하다

옥중 19년

대빈창 2021. 4. 13. 07:00

 

책이름 : 옥중 19년

지은이 : 서승

펴낸곳 : 진실의힘

 

활활 타고 있는 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말 들이 연료통이 비닐파이프로 난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기름통을 들어 올려 뚜껑을 열고 머리 위로부터 기름을 들이부었다. 탁자 위에 있던 조서 한 장을 가늘게 말아 난로 불을 붙였다. 불을 복부에 붙였지만 예상과 달리 불이 확 타오르지 않았다. 경유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감질나게 느릿느릿 불이 붙었다. 팔을 감싼 스웨터가 타면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불꽃이 점점 거세지면서 어깨와 얼굴로 퍼지자 더는 견디지 못해 목구멍 사이로 비명이 터지면서 시멘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눈물이 눈자위를 따라 흘렀다. 입속에서는 되풀이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어머니, 용서해주세요.” (37 - 39쪽)

 

서승(徐勝, 1941 - )은 1971년 4월, 대선을 불과 열흘 앞두고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박정희 정권은 3선을 노리며 유력한 야당후보 김대중에게 용공혐의를 씌웠다. 기획·조작된 간첩단 사건이었다. 조국을 사랑했던 재일교포 청년 서승의 19년 감옥살이의 시작이었다. 서승은 ‘조센’이라는 욕을 들으며 자랐고, 조선인이라는 자의식은 어릴 적부터 싹텄다. 1964년 도쿄교대 1년 때 재일한국인학생 조국방문단 일원으로 처음 한국에 왔다. 서승은 민족의식이 고양되면서 한국말을 못한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가졌다. 1968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 유학을 왔다. 1971년 방학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오면서 김포공항에서 보안사에 체포· 연행되었다.

쿠데타이후 8년을 집권한 박정희의 3선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치열했다. 옆방 학우들이 고문을 당하면서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서승은 고문에 의해 학우들에게 죄를 덮어 씌우지 않을까 공포에 휩쓸렸다. 군 정보기관 보안사의 ‘시나리오’를 깨달은 청년은 죽음을 선택했다.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사건〉. 서승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심에서 사형을, 상고 기각으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서승은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그리고 비전향 장기수로 19년간 ‘감옥 속의 감옥’에 갇혔다.

책은 70 - 80년대 정치범 특별사동의 세부와 비전향 장기수들의 옥중 삶을 세세하게 그려냈다. 일평생 온 몸으로 분단의 고통을 겪어왔지만 비전향장기수는 남과 북에서 존재가 잊히고 지워진 사람들이었다. 43년 10개월을 갇힌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 선생 등 수십 명의 양심수들의 살아온 내력을 기억에서 살려냈다. 겨울의 특별사동은 양동이 물이 두껍게 얼었다. 숨을 쉬면 천장과 벽에 닿자마자 허옇게 얼어붙어  방 전체가 냉동실과 다름 없었다. 빗자루로 쓸면 서리가 눈처럼 내렸다. 허기진 속을 채우려 변소에서 나온 쥐를 잡아먹었다. 세면장 하수구에 떨어져 있던 콩을 간수 몰래 주워 씻어 먹었다. 정치범들은 겨우내 반년동안 빨지 못해 지독한 냄새가 나는 빛바랜 푸른 죄수복을 입었다. 

1974년부터 비전향수에 대한 사상전향이라는 잔인한 국가폭력이 시작되었다. 비전향수들은 잔혹한 고문 끝에 살해되거나 자살로 항거했다. 병에 걸린 사람에게 약을 원하면 전향서를 작성하라고 윽박질렀다. 전향공작에서 가장 추악한 본질을 드러낸 것은 최주백 선생의 경우였다. 위장암에 걸린 선생을 수술시켜주겠다고 했으나 선생은 거부했다. 선생이 숨을 거두자 시체의 지문을 전향서에 찍어 비전향수에게 선생이 전향했다고 선전하고 다녔다. 서승은 단식투쟁으로 맞섰고, 물고문을 당했다. 반죽음 상태로 수갑과 포승줄에 묶여, 무더위로 숨이 막히는 폐쇄독방에 갇혔다. 조금이라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변기 위에 비스듬히 누워 환기구에 얼굴을 바짝대고 물가에 밀려 온 물고기처럼 입을 뻐금거릴 뿐이었다.

2월 28일 새벽 4시, 방문이 열렸다. 밖은 아직 캄캄했다. 특사의 동지들은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마치 자기의 석방을 기다리는 것처럼 서승의 석방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각 방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동지! 잘 가세요!”(287쪽) 그가 감옥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접하는 장면을 읽으며 나는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두 아들을 조국의 차가운 감옥에 빼앗긴 어머니는 글을 모르셨다. 두 자식의 면회를 다니기 위해 나이 50에 글을 배우셨다. 어머니는 면회를 오셔서 늘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 의롭지 못한 인간들에게 결코 굴복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보여 준 따뜻함과 올곧음 그리고 자식에 대한 신뢰는 감동적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때까지 10년 동안 50번을 일본에서 한국 교도소로 면회를 오셨다.

서승은 1974년 국제엠네스티가 선정한 ‘세계의 양심수’였다.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사상전향서를 쓰지 않고, 끔직한 고문을 이겨냈다. 그는 잔혹한 사상 전향 공작에 맞서 장장 19년을 옥중에서 버텼다. 서승은 이 땅의 양심수와 인권의 상징이었다. 그가 감옥을 나선지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독재정권의 인권탄압 수단으로 전가의 보도가 된 국가보안법은 이 땅에서 지금도 기세등등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서울시공무원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이 터졌다.  제1회 인권상을 서승에게 수여한 재단법인 《진실의힘》은 품절된 『옥중 19년』의 개정판을 냈다. 재단은 70 - 80년대에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된 피해자들과 진실 규명을 함께 해 온 인권활동가·변호사·의사들이 힘을 모아 만든 단체였다.

분단으로 고통받는 조국을 사랑한 재일교포 2세 서승의 삶은 참혹했다. 기구한 운명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그는 낙천적으로 말했다. “한국 현대사의 모순과 수난이 응집된, 감옥이나 출옥 후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은 잃어버린 19년을 보상하고 남았다”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크흑!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재판정을 바라보는 화상으로 시커멓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첫 공판을 받는 서승은 화상으로 귀가 녹아내려 안경테를 천으로 머리에 묶어 고정했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  (0) 2021.04.15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0) 2021.04.14
이지누의 집 이야기  (0) 2021.04.09
세습 중산층 사회  (0) 2021.04.08
언젠가, 아마도  (0) 2021.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