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지은이 : 김사이
펴낸곳 : 창비
구로공단역을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바꾸더니 / 가리봉역을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꿨다 / 구로, 공단, 가리봉 이 거리에 / 이십여년 내 삶의 흔적이 지워졌다 / 성장통이 담긴 내 청춘의 시들이 / 정처가 없이 헤맨다 (「탈 탈」, 1연)
가난이 쉰내 나도록 뭉쳐 버티는 벌집촌 / 골목 귀퉁이에 나란히 선 / 전봇대와 가로등 / 이른 밤 슈퍼도 문을 닫고 / 귀청을 뜯는 악다구니 소리도 없다 (「골목의 노래」, 1연)
시편을 읽으며 나의 기억은 25여년 저편을 떠올렸다. 그 시절, 나는 문래동 마찌꼬바 견습공이었다. 가리봉 오거리의 벌통방에서 누렇게 바랜 밥통의 아침밥을 우겨넣고 시내버스를 탔다. 그래 맞다. 한 달 봉급을 타면 우선 토큰부터 사놓았다. 가리봉 시장에서 배추 포기김치와 밑반찬 한가지와 봉투 쌀을 가슴에 품고 언덕길을 올라왔다. 가장 싼 솔담배 두 보루도 잊지 않았다. 그곳을 떠난 후 나는 이제껏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시인은 1971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중학까지 다녔다. 광주에서 고교를 다녔고,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93년 서울에 올라왔다.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詩를 썼다. 2002년 계간 『시평』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2008년 『반성하다 그만둔 날』(실천문학사)를 냈다. 10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이었다. 4부에 나뉘어 57 시편이 실렸고, 해설은 문학평론가 서영인의 「자본과 노동의 포장을 벗기면」이었다.
첫 시집은 시인이 살기위해 밥벌이로 삼았던 구로공단 이야기와 아버지의 증오서린 가족사를 그렸다. 두 번째 시집은 변화된 노동환경의 이면과 차별받는 여성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응시했다. 시인의 예리한 시선은 가부장적 봉건제가 완고한 이 땅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삶의 고통을 짚어냈다. 세 번째 시집은 여성과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은 시집을 여는 첫 시 「거리에서」(10쪽)의 전문이다.
문을 열고 나가니 / 안이다 / 그 문을 열고 나가니 / 다시 안이다 / 끊임없이 문을 열었으나 / 언제나 안이다 / 언제나 내게로 되돌아온다 / 문을 열고 나가니 / 내가 있다 / 내게서 나누어지는 물음들 / 나는 문이다 / 나를 열고 나가니 / 낭떠러지다 / 닿을 듯 말 듯 한 낭떠러지들 / 넋 나간 슬픔처럼 떠다닌다 / 나는 나를 잠그고 / 내가 싼 물음들을 주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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