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어제 그곳 오늘 여기
지은이 : 김남일
펴낸곳 : 학고재
북한의 함경도를 배경으로 좌익항일운동의 역사를 다룬 7권의 대작 『국경』의 김남일은 80년대 민중·노동문학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였다. 돌이켜보니 그의 작품을 손에 잡지 못했다. 80년대말 달동네 약수동 변두리 서점에서 출판사 《풀빛》이 펴낸 『소설 창작의 길잡이』를 손에 넣은 것이 유일했다.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제3회(2012년) 권정생 창작기금 수상작 『천재토끼 차상문』은 소설가와 만난 첫 작품이었다. 이 땅의 극악무도한 현대사를 조명하고 더 나아가 인류 문명을 위협하는 생태계 파괴를 근본주의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군립도서관에서 우연히 산문집 『책』을 발견했다. 소설가의 신간 두 권을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한국 근대작가들의 무대를 재조명한 『염치와 수치』는 뒤로 밀렸다.
『어제 그곳 오늘 여기』는 소설가가 아시아의 이웃 나라 10여 곳의 도시를 여행한 기록을 모았다. 책은 ‘아시아 이웃 도시 근대 문학 기행’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베트남의 바오닌, 일본의 오시로 다쓰히로·미시마 유키오·나쓰메 소시키, 중국의 루쉰, 한국의 이광수·홍명희가 거닐었던 어제 그곳과 오늘의 사이공, 교토, 상하이, 도쿄, 타이베이, 하노이, 오키나와, 서울의 오늘 여기의 시공간을 삶과 문학으로 가득 채웠다. 소설가는 문학 작품을 지도로 삼아서 동아시아의 도시들을 걸었다. ‘아시아는 소수, 주변, 방언의 다른 이름이었다. 인구가 전 세계의 5분의 3을 차지해도 늘 소수였고, 서구 문명에 토대를 두지 않은 이상 늘 주변이었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 늘 방언이었다.’(23쪽)
소설가의 첫 해외여행지 일본에서 출국수속을 밟는데 재일동포 노인이 ‘통일시계’를 선물했다. 인솔자 임헌영 문학평론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화를 내며 받은 시계를 총련계 노인의 가슴에 돌려주었다. 일행은 임 선생이 겪은 고통과 트라우마를 충분히 짐작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조작한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사건〉. 소설가가 교토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장면은 도심 한복판을 흐르는 시라가와였다. 해오라기 한 마리가 잔잔한 물속에 발을 담근 채 때를 기다렸다. 우리는 콘크리트 수조에 모터로 한강물을 쏟아 부은 청계천을 생태공원이라고 우겨댔다. 다섯 번째 챕터 「세 작가의 도쿄, 세 개의 근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명인에게, 베를린이다. 그 베를린.”(185쪽) 1987년 「지식인문학의 위기와 새로운 민족문학의 구상」의 문학평론가 김명인을 떠올렸다. 출판사 《학고재》의 세계문화예술기행 독일편 『잠들지 못하는 희망』이 뒤를 이었다.
“대만이 일본에 할양된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291쪽) 민진당 출신으로 대만의 부총통을 지낸 뤼수이롄이 1995년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100주년 기념식에서 말했다. 그녀는 국민당 철권통치시절 민중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대만독립파의 입장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은 저마다 다른 처지에서, 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근대를 맞이했던 것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호찌민 주석의 부드러우면서 힘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파리로 떠나면서 주석대행 후인 툭캉에게 이렇게 말했다.
"以不變 應萬變 - 내 안의 불변으로 만변하는 세계에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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