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후르츠 캔디 버스
지은이 : 박상수
펴낸곳 : 문학동네
복간시집 시리즈 '문학과지성 시인선 R'의 첫째 권은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으로 2012년 11월에 출간되었다. 시집을 펼친 연륜이 짧은 나는 시집 시리즈 전부를 손에 넣었다.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가 열여섯 권 째로 2018년 7월에 나왔다. 이후 복간 시집 시리즈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신간 시집을 물색하다 출판사 《문학동네》의 복간시집 시리즈 ‘문학동네포에지’를 만났다. 1차분 10권은 중견시인들의 첫 시집이었다. 나는 이중 세 권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박상수의 『후르츠 캔디 버스』를 먼저 손에 들었다.
복간 시집의 「시인의 말」은 두 개였다. 2006년 2월과 2020년 10월에 썼다. 시인의 첫 시집은 시집전문 출판사 《천년의시작》에서 나왔다. 14년 만에 새얼굴을 문학동네에서 내밀었다. 4부에 나뉘어 51 시편이 실렸다. 복간 시집은 발문도 해설도, 그 흔한 표사마저 없었다. 시집은 소년·소녀 사춘기의 성장기 추억 앨범이었다.
「차례」를 훑어보다 4부의 「카페 WILL」에 끌렸다. 1965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Pink Floyd를 떠올렸다. 밴드는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이었다. 앨범 「The Will」은 파괴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한 어두운 단면을 드러냈다. 국도변 시골에 자리 잡은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불현듯 나타나는 새 건물의 1층 한 칸을 차지한 그 흔한 카페일 것 같았다. 넓은 주차장은 텅 비었고, 달랑 주인 바리스타의 차 한 대가 외롭게 서있는 카페일 것이다. 나의 상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바로 앞의 시 「초대」 2행은 ‘홍대의 4번 출구 카페 WILL 앞’ 이었다. 마지막은 「백년슈퍼」(31쪽)의 전문이다. 나의 사춘기 추억이 짙게 묻어있는 변변한 상호하나 없던 구멍가게는 신작로 48번 국도가 아스팔트 8차선으로 확장되면서 헐렸다. 가난했던 그 시절, 친구의 어머니가 차려주신 겨울냉면이 지금도 혀끝에 달달했다.
떨어진 창문, 목조 가옥 따라 걷다보면 백 년 전에도 있었던 듯 가게 하나, 잠든 노파는 깨어날 줄 모르고 빛이 스러진 여자아이 한쪽 눈만 깊다 오려만든 인형처럼 오려붙인 웃는 눈, 못한 말 더께로 내려앉아 바랜 선반 위엔 비누 쏠다 들킨 집쥐 도망갈 줄 모른다 가라앉는 집, 고여 소리도 없는 한숨에 젖어갈 때쯤 쪽방 문턱 걸터앉아 사이다 나눠 마신다 술에 취한 듯 코가 매워지고 자꾸만 붉어지는 눈동자, 아이는 간지럼을 타듯 기침을 한다 고개 들면 들썩이는 문짝 너머 검은 고무줄 다발 하늘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어디선가 석유곤로 찌개 냄새, 저 혼자 파묻힌 채 낡아가는 백년슈퍼.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년의 눈물 (0) | 2021.05.03 |
---|---|
무탄트 메시지 (0) | 2021.04.30 |
두렵고 황홀한 역사 (0) | 2021.04.28 |
민어의 노래 (0) | 2021.04.27 |
얼굴, 한국인의 낯 (0) | 2021.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