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허기진 도시의 밭은 식탐

대빈창 2021. 5. 4. 07:00

 

책이름 : 허기진 도시의 밭은 식탐

지은이 : 황교익

펴낸곳 : 따비

 

서울 설렁탕 / 종로 빈대떡 / 신림동 순대 / 성북동 칼국수 / 마포 돼지갈비 / 신당동 떡볶이 / 용산 부대찌개 / 장충동 족발 / 청진동 해장국 / 영등포 감자탕 / 을지로 평양냉면 / 오장동 함흥냉면 / 동대문 닭한마리 / 신길동 홍어 / 홍대 앞 일본음식 / 을지로 골뱅이 / 왕십리 곱창

 

책에 소개 된 17가지 음식이다. 빈대떡·순대·칼국수·족발·감자탕·평양냉면·함흥냉면·닭백숙·홍어·일본음식·골뱅이·곱창을 서울의 대표음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목차를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울시 조사에 의하면 토박이라고 부르는 3대째 이상 서울에 거주하는 세대는 불과 6.5%에 불과했다. 서울시 인구의 95%가 전국 팔도 각지에서 서울로 삶터를 옮긴 이주민이었다.

세월이 흘렀고 한국전쟁의 피난민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을지로 평양냉면과 오장동 함흥냉면을 먹으며 추운 겨울 아랫목에서 들이켜던 어머니 냉면 맛을 떠올렸다. 신림동 순대타운의 상호는 하나같이 전라도 지명이었다. 빚만 늘어가는 궁핍한 고향을 떠나 서울 변두리로 이주한 전라도 농민들은 신림동 인근에 많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하루의 고된 노동과 집안 살림의 시름을, 신림시장의 값싼 순대볶음에 소주 한잔으로 날렸을 것이다.

한 시절, 술에 찌들어 세월을 흘렸다. 뇌세포는 균열이 가고, 온 몸에서 알코올 내가 진동했다. 핵 페기물을 한움큼 입안에 문 느낌이었다. 쓰리고 허기진 속을 부여잡고 찬우물 삼거리 설렁탕집을 찾았다. 출입문에서 마주 보이는 벽에 설렁탕의 선농단 유래설이 대문짝만하게 붙었다. 조선 왕의 논밭갈이 행사 후 동원된 소를 잡아 큰 솥에 삶았다. 끓인 탕국에 밥을 말아 구경 나온 백성에 먹인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이 설은 한때 그냥 ‘썰’일 뿐이었다. 설렁탕(또는 곰탕)은 고려시대 몽골에서 온 말로 소의 여러 부위를 넣고 끓이는 음식이었다.

‘시장골목에 예닐곱의 순댓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몰려 있는 것은 전국이 똑같다. 식당 앞에는 돼지 머리가 놓여있고 그 곁에는 커다란 솥이 두어 개 걸려 있다. 한 솥에는 돼지뼈를 곤 국물이 끊고 있고, 또 한 솥에는 순대와 내장, 머릿고기가 데워지고 있다.’(53쪽) 80년대 중반 군홧발정권시절, 나의 하루는 소도시 시장골목의 순댓집에서 시작하고 날이 저물었다. 상호는 ‘3호집’이었다. 바깥양반은 한 손의 손목아래가 없어 볼 때마다 애처로웠다. 아주머니는 물큰내를 풍기는 양은솥 뚜껑을 열 때마다 솟아오른 자욱한 김 속에서 연신 얼굴의 땀을 훔쳤다. 술을 퍼붓기로 작정한 날은 순댓집의 다락방에서 해장술로 하루를 시작했다. 앉아서도 머리를 부딪는 낮은 천장에 빈 막걸리통이 닿을 정도였다. 술을 들이붓다 곯아 떨어졌고, 자다깨다 비몽사몽 술잔을 들었다. 날이 어둑해서 비척거리며 골방으로 돌아왔다.

‘뼈다귀도 그렇고, 감자도 그렇고, 감자탕은 태생에서부터 하층민의 음식이었다. 쇠뼈의 설렁탕도 못 먹고, 쌀밥도 못 먹던 사람들의 음식이었다.’(154쪽)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의 여름 어느날, 나는 영등포 역 앞 감자탕 골목에 들어섰다. 테이블 서너 개뿐인 좁은 홀에 식객은 나 홀로였다. 드디어 감자탕이 내 앞에 놓였다. 그 음식은 ‘돼지뼈 우린(?)탕’이라고 불러야 제격이었다. 손톱만한 감자 두 알이었던가. 돼지 등뼈는 이쑤시개로 쑤셔 낼 고기 한 점 붙어있지 않았다. 고춧가루 풍년인지 붉은 국물이 가득했다. 밥 한 공기를 말아 고픈 배에 허겁지겁 우겨 넣었다.

책은 개발독재에 밀려 고향을 등지고 낯선 서울에 정착한 가난한 이주민들의 삶이 녹아있었다. 서울 사람들의 밭은 식탐을 달래주던 음식을 기억하고 기록한 맛 칼럼니스트가 새삼스럽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주사거배酒肆擧盃〉는 솥 앞에 주모가 앉아있다. 도판의 경남 의령 재래시장 종로식당 구조가 그림과 흡사했다. 나는 허기가 몰려오면 돼지국밥부터 떠올렸다. 언제인가 나의 답사는 경남을 떠돌 것이다. 낯선 땅을 떠돌던 발길을 돌려, 의령의 종로식당을 찾아 국밥 한 그릇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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