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

대빈창 2021. 6. 8. 07:00

 

책이름 :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지은이 : 이문구

펴낸곳 : 문학동네

 

『관촌수필』(1977), 『우리 동네』(1981), 『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2000). 이로써 명천鳴川 이문구(李文求, 1941 - 2003) 선생의 연작소설 3부작을 두 번씩 책씻이했다. 세 권의 연작소설은 가난하고 소외 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질박한 삶을 그려냈다. 명천 선생의 문학 세계는 토박이말과 생생한 입말이 살아 숨 쉬는 충청도 사투리로 풀어내는 유장한 문장에 있었다.

 

장평리 찔레나무 / 장석리 화살나무 / 장천리 소태나무 / 장이리 개암나무 / 장동리 싸리나무 / 장척리 으름나무 / 장곡리 고욤나무 / 더더대를 찾아서

 

『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는 8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7편의 제목에 ‘나무’가 들어있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생김새도 볼품없고 그다지 쓸모가 없는 나무들이었다. 작가는 말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가치가 희미한, 그러나 자기 줏대와 고집은 뚜렷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돈 없고 힘 없는 일년살이들도 숲을 이루는 데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집은 90년대 농촌풍경과 사람살이를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그려냈다.

「장이리 개암나무」의 전풍식田豊植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과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살림초고』를 읽고, 까치가 집 남쪽에 있는 나무에 둥지를 지으면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고 믿게 됐다. 집 앞 구지뽕나무에 까치가 둥지를 짓는 것을 보면서 그는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리라고 혼자 기꺼워했다. 소설가의 묵은 산문집 『까치둥지가 보이는 동네』(바다출판사, 2003)를 다시 잡아야겠다. 마지막 작품 「더더대를 찾아서」의 이이립李而立은 낙향한 소설가 이문구의 직접적인 심경고백으로 읽혔다. 여기서 ‘더더대’는 깨진 사금파리를 한 자루씩 걸머메고 다녔던 말더듬이를 일렀다.

띠지에 〈2000 東仁文學賞〉 고딕체가 뚜렷했다. 그즈음 이 땅은 ‘안티조선일보 운동’ 바람이 일고 있었다. ‘동인문학상’은 조선일보에서 주는 상이었다. 2000년 황석영, 2001년, 공선옥, 2003년 고종석은 자신의 소설이 동인문학상 심사대상에 거론되는 자체를 거부했다. “어떤 이는 동인문학상이 나의 경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더 잘 알고 있듯이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이문구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주도해 발족시켰다.

명천 선생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모질고 극악한 이 땅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감내한 선생의 가족사를 알아야 했다. 남로당 보령군당 총책이었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으로 학살되었다. 빨갱이로 몰려 둘째 형은 오랏줄에 묶여 살해되었고, 셋째형은 산 채로 대천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난리 통에 아들과 손자 둘을 잃은 할아버지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뒤따라 세상을 등졌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고아아닌 고아로 상경해 막벌이꾼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면서 선생은 1961년 서라벌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문학가가 되면 난리통에도 개죽음만은 면할 수 있겠구나." 선생은 우익 문단의 거목 김동리의 제자가 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상처 많은 스물 살 청년 이문구’를 김동리는 아버지처럼 가슴에 품어주었다. 피상적 앎이란 그만큼 무책임한 것이었다. 그동안 나의 가벼운 이분법에 진저리를 쳤다. 명천 선생의 친구 『죽음의 한 연구』의 소설가 故 박상륭은 "이문구는 군자였고, 선비였으며, 대인이었다."고 회고했다. 2003년 2월 25일 눈을 감은 선생의 유언은 "내 이름을 운운하는 문학상을 만들지 말고, 문학비도 세우지 말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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