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 369호 고려 21대 희종熙宗의 무덤 석릉碩陵은 울울鬱鬱한 신록新綠을 뚫고 나아가야 만날 수 있었다. 양도에서 불은으로 향하는 고려왕릉길을 가다 《강화江華 석릉碩陵》 안내판이 가리키는 마을길로 좌회전하여 꺽어들었다. 뱀이 기어가는듯한 마을길은 다랑구지 논이 띄엄띄엄 나타나는 골짜기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길가 집들의 화단마다 불두화와 붓꽃이 만발했다. 마을길은 신록이 우거진 산길로 이어졌다. 막다른 길의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륙색을 쟁였다. 석릉은 진강산의 동쪽 남사면에 자리잡았다. 릉을 찾아가는 산길은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다 산사면을 횡단하며 구불구불 이어졌다. 녹음이 우거진 산속은 사람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산짐승의 피해를 방지하는 철책이 오르막 산길을 줄곧 따라왔다. 길가의 ‘어두고인돌’에서 잠시 땀을 들였다.
인적 없는 산길에 드문드문 릉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가 답사객의 발길을 안내했다. 1.2km, 1km, 350m, 200m, 30m. 1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있는 세 갈래 길에 곤릉으로 향하는 화살 표시가 있었다. 산중턱을 넘어서자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길가의 일반인 묘지 5기를 지나치자 30m 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반가웠다. 여적 흙길을 밟았는데 릉이 가까워오자 골짜기의 물길을 막돌로 정비한 구간이 나타났다. 나들길을 걷는 이들은 되돌아가라는 안내문이 릉역 입구에 서있었다. 신록이 울울한 릉역은 바람 한점 없었다. 후덥지근한 숲속에서 나홀로 땀을 흘렀다. 적막과 고요를 새울음이 흐뜨렸다.
게단을 올라서자 낮은 석축과 곱게 잔디를 입힌 3단 릉의 봉분을 돌담장이 앞쪽이 트인 ㄷ자형으로 둘러쌓았다. 릉역을 장식한 석물石物은 단출했다. 하나의 문인석만 제 자리를 잡았다. 마주보고 서있을 문인석은 애처롭게 목이 잘려, 비석으로 보이는 몸뚱이에 얹힌 채 돌담장 앞에 서있었다. 무덤 앞 가운데 〈高麗熙宗碩陵〉의 각자가 새겨진 비석도 상단이 엇비슷하게 깨졌다. 왕은 죽어서도 외롭고 쓸쓸했다.
고려 21대 왕 희종(재위 1204 - 1211)은 불운한 왕이었다. 시절은 최씨무신정권이었다. 희종은 20대 신종의 장남으로 1200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204년 왕위에 올랐다. 1211년 12월 실질적인 권력자 최충헌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페위되어 강화도로 쫓겨났고, 영종도에 유폐되었다. 1215년 교동도로 옮겼고, 1219년에 개성으로 돌아왔다. 1227년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왕위 복위 음모를 씌워 희종을 다시 강화도로 쫓아냈다. 이어 교동도에 유폐되었다가 승하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석릉은 조선 현종때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찾아 다시 무덤을 쌓았다. 이후 무너진 능을 1974년에 손질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2002년 발굴 조사로 12 - 13세기 고려청자 전성기에 만들어진 ‘청자상감국화문잔탁’이 출토되었다.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석릉 주변의 고분군을 발굴조사했다. 118기의 고분군은 석릉이 위치한 주변 5개의 능선에 분포했다. 지진구地鎭具, 동물 형상의 철제 향로, 석물石物로 석호石虎, 석양石羊, 석인상石人像, 항아리, 유병油甁, 중국 송宋의 화폐 북송전北宋錢 등이 수습되었다. 릉역 한 구석의 작은 나무 팻말이 눈에 뜨였다. 마지막은 강화도 선비 고재형(高在亨, 1846 - 1916)의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실린 한시漢詩 「석릉碩陵」이다.
碩陵知在鎭江巒 석릉이 진강산에 자리함을 아노니,
獨閉空林月影寒 빈숲에 홀로 문 닫고 있자니 달그림자 차갑구나.
椅我聖朝封築謹 아, 우리나라 조정에서 봉분을 수축하고,
年年奉審地方官 해마다 지방 관리가 받들어 살핀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