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 371호 강화江華 곤릉坤陵을 찾아가는 길은 나에게 링반데룽이었다. 독일어 링반데룽Ringwanderung은 둥근 원을 뜻하는 ‘Ring’과 걷는다는 뜻의 ‘Wanderung’이 합쳐진 환상방황環狀彷徨을 가리켰다. 등산 도중 짙은 안개·폭우·폭설과 같은 악천후로 인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같은 지역을 맴도는 현상이었다. 20여 년 전 강화도 답사기 『강도江都를 가다』를 지역신문에 연재하며 양도 길정리의 고려왕릉을 찾았다. 그 시절은 이정표조차 제대로 서있지 않았다. 길도 없는 산속을 아마존의 원주민이 밀림을 뚫고 나가는 것처럼 고역을 치룬 끝에 간신히 능역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 찾은 능이 석릉인지 곤릉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곤릉으로 향하는 마을길에 들어섰다. 양도에서 불은 방면으로 고려왕릉길을 타면 석릉과 곤릉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한 마을 건너 버스정류장에 서있다. 석릉과 곤릉은 진강산 남록 능선에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한 달 전 나는 곤릉을 찾다가 사람 키 두 배를 넘는 철책에 가로막혀 되돌아섰다. 군사보호구역 시설을 알리는 경고문 앞에서 나는 황당했다. 도대체 어디서 길을 잃은 것일까. 세 번째 곤릉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권능교회를 지나면 곤릉坤陵을 가리키는 작은 이정표가 전봇대에 매달렸다. 빈집 마당에 차를 주차하고 륙색을 쟁여 오른쪽 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차광막을 덮은 인삼하우스 단지를 지나 산속으로 들어갔다. 갈래길에서 시멘트 포장길은 버리고 수풀이 우거진 오른쪽 비포장길로 향했다. 임목 불법 벌체 행위금지와 사유지를 알리는 경고판이 나타났다. 다랑구지 무논을 쓸리는 트랙터 소음이 산중의 적요에 틈을 냈다. 봄비가 잦아 작은 개울을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했다. 개울가에 철늦은 하얀 찔레꽃이 만개했다. 사람 흔적이 없는 산길에 새끼손톱만한 열매를 매단 개복숭아나무가 눈앞을 가렸다. 질경이와 잡쑥이 산길을 뒤덮었다. 어제 밤새 비가 퍼부었는지 대기는 물기로 흥건했다. 사격장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연발음으로 귀가 따가웠다. 분명 한달 전 나의 답사길을 가로막은 군사보호구역에서 나는 소리였다.
낮은 경사를 오르자 그동안 고려왕릉 답사에서 낯익은 3단 축대로 조성된 능역이 나타났다. 깊은 산중에 CCTV가 홀로 우뚝했다. 곤릉은 고려 강종(재위 1211 - 1213)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 - 1239)의 능으로 가릉과 함께 남한에 남아있는 유이有二한 고려 왕비 능이었다. 1211년 강종의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에 봉해졌다. 원덕태후는 강종의 두 번째 왕비로 고려 23대 고종高宗의 어머니였다. 릉역은 석물石物이 보이지 않았다. 묘앞 좌우에 왕릉표지석과 사적지표석 2기의 비석이 쓸쓸했다. 돌이끼가 두껍게 앉아 비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2004년 발굴 조사 때 석인상의 머리, 파손된 석수, 난간석, 하대석이 나왔다. 봉분 하단을 호석이 둘렀는데, 9개만 남았다. 나의 짧은 식견은 통일신라 김유신묘의 12지신석의 흔적으로 보였다.
경주의 신라 왕릉, 공주·부여의 백제왕릉, 서울·경기의 조선왕릉은 모두 수도에 위치했다. 고려왕릉은 당연히 수도 개성에 자리잡아 북한에 위치했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1232년(고종 19)에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遷都했다. 1270년(원종 11)에 환도하여 39년간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였다. 남한에 고려왕릉 5기가 남았다. 고려가 망한 후 조성된 고양의 공민왕릉을 제외한 4기의 릉이 강화도에 있다. 홍릉(洪陵, 사적 224호), 석릉(碩陵, 사적 369호), 가릉(嘉陵, 사적 370호), 곤릉(坤陵, 사적 371호)이다. 석릉에도 작은 나무 팻말에 강화도 선비 고재형(高在亨, 1846 - 1916)의 한시漢詩가 쓰였다. 마지막은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실린 「곤릉坤陵」이다.
德庄南麓白雲深 덕장산 남쪽 기슭 흰 구름이 덮혔는데,
指是坤陵屹到今 이 곤릉이 지금껏 우뚝하게 서있네.
短草萋萋松未老 풀들은 우거지고 소나무도 안 늙어서,
猶含舊國可憐心 고려 왕조 가련한 마음을 아직도 머금고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