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까치와 고양이

대빈창 2021. 5. 26. 06:25

 

주말 이틀 내내 빗줄기가 퍼부었습니다. 89mm라는 5월 중순 역대급 강우량을 기록했습니다. 줄기차게 쏟아 붓는 봄비로 대빈창 다랑구지의 무논이 빗물로 흥건했습니다. 새로운 주말을 시작하며 일찌감치 아침 산책에 나섰습니다. 하늘은 그래도 부족하다는 듯 잔뜩 찌뿌듯했습니다. 허공을 한 주먹 쥐었다가 손바닥을 벌리면 물기가 묻어날 것 같았습니다. 고구마와 고추 묘가 한창 심겨지고 있는 밭과 봉구산자락 사이를 이리구불 저리구불 옛길이 흘러갔습니다. 돌아오는 산책에서 낮은 오르막에 올라서면 대빈창 언덕 우리집 옥상의 태양광 패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집에 거의 다 왔습니다. 뒷집 뒤울안으로 눈길을 돌리자 까치가 머뭇머뭇 걸음을 옮겼습니다. 까치를 예의 주시하던 재순이가 잔뜩 부르튼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까치는 고양이 밥을 훔쳐 먹다, 인기척을 느끼고 자리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밥그릇에 미련이 남아 날아가지 못하고, 딴 짓을 피웠습니다. 까치는 고양이 밥을 훔치지 않았다고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시치미를 떼다’는 자기가 한 일을 짐짓 하지 않은 체하거나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것을 이릅니다. 우리나라의 매사냥은 삼국시대부터 있어왔습니다. 어린 야생 매를 사냥에 적합하도록 길들였습니다. 이를 ‘수지니’라고 불렀습니다. 수지니가 달아날 경우를 대비해 쇠뿔을 얇게 깎아 만든 이름표에 주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고 매의 꽁지 털 속에 매달았습니다. 매의 이름표가 바로 ‘시치미’였습니다. 매는 달아나도 배가 고파 멀리 가지 못했습니다. 인근 마을에서 발견되면 시치미에 적힌 주인을 찾아 매를 돌려 주었습니다. 매 주인은 그에 대한 사례를 톡톡히 했습니다. 간혹 시치미를 떼고 슬쩍 가로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치미를 떼다’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1년여 전 블로그에 올린 「까마귀와 고양이」에서 밭 가운데 버려진 음식쓰레기를 가운데 두고 서로 노려보는 고양이와 까마귀를 만났습니다. 허기가 졌던 검돌이는 까마귀를 사납게 내몰았습니다. 재순이가 미련한 것인지, 아니면 여유만만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까치가 자기 밥에 입을 데도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까치가 뒷집 뒤울안의 고양이 밥을 훔쳐먹는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순이는 이른 아침부터 어디를 쏘다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련한 놈 재순이도 제 밥때만큼 정확하게 지켰습니다. 아침 산책을 나서면 뒷집을 지나 옛길 밭머리에 서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지나게 됩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나를 마주보고 걸어옵니다. 멀리서보아도 영락없이 재순이입니다. 밤새 어디를 쏘다니며 사냥을 하다가 아침밥을 먹으러 제 집을 찾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재순이는 아침밥을 배불리 먹었는 지 까치가 제 밥을 도둑질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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