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나의 조선미술 순례

대빈창 2021. 6. 30. 07:00

 

책이름 : 나의 조선미술 순례

지은이 : 서경식

옮긴이 : 최재혁

펴낸곳 : 반비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3)는 ‘미술 기행’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었다. 고문 조작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두 형(서승, 서준식)은 조국의 감옥에 20여 년을 갇혔다. 옥바라지하던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여러 유럽미술관에서 만난 그림과 조각들은 지하실의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박한 공기와 같았다. 책은 예술이 역사와 현실에서 접점하고 확장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30대 청년이 이제 60대가 되어 한국의 미술가를 만나고, 조국의 미술관을 순례한  『나의 조선미술 순례』(반비, 2014)가 출간되었다.

서경식은 표제를 ‘조선미술’로 잡은 이유를 “‘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긴장과 불안, 때로는 공포마저 느껴왔는데, 이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정직한 반영이다. 나는 억울함을 당한 이 호칭을, 그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학대’에서 더욱 구출하고 싶은 것이다.”(10쪽)라고 했다. 예술이 배타적인 ‘국민화’의 도구가 아니라 차별과 배제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순간을 잡아챘다.

책에서 다룬 작가는 1980년 광주의 기억을 미술로 표현한 민중미술가 신경호(전남 광주, 1949 - ), 사진·영상·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반 시민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작품화하는 정연두(경남 진주, 1969 - ), 40대 전업주부에서 일상을 벗어던지고 미술을 시작한 1세대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중국 만주, 1939 - ),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포로 교환 때 월북한 이쾌대(경북 칠곡, 1913 - ?), 조선 3대 풍속화가로 기생의 초상화 「미인도」를 그린 혜원惠圓 신윤복(1758 - ?), 고아로 어린 시절 벨기에로 입양돼 전 세계를 떠돌며 작품활동을 하는 디아스포라 예술가 미희=나탈리무드안(한국 부산, 1968 - ). 부록으로 파독 간호사 출신 재독화가 송현숙(전남 담양, 1952 - ) , 광주민중항쟁 시민군 문화선전대원이었던 민중미술가 홍성담(전남 신안, 1952 - ) 이었다.

저자는 「후기를 대신하며, 순례의 중간 보고」에서 일본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한국전쟁 때 북한을 떠나 피난생활 끝에 가족과 헤어지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병사한 이중섭(평남 평원, 1916 - 1956)과 해방후 남한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후 화가로서 인정받았으나,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북으로 귀국해 끝내 소식불명이 된 조양규(경남 진주, 1928 - ?)를 싣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일제강점기 36년, 나라 잃는 조선인은 살길을 찾아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책은 '억압받고 추방당한 자로서의 예술가, 즉 근대라는 폭력의 시대를 자기만의 조형언어로 시각화한 사람들에 대한 진혼과 사유, 그리고 연대 표명'(383쪽)이었다.

단일하고 고정된 정체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들에 대한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이렇게 말했다. “ 미술의 특징은 로고스(말·논리)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 말로 표현하면 잃어버리는 것을 미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은 미술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주류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당한 사람들의 울분이나 슬픔은 말이 아니라 작품으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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