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지은이 : 정민
찍은이 : 김춘호
펴낸곳 : 글항아리
고전 인문학자 정민은 2006년 가을, 다산의 친필 편지를 보려 강진의 백운동 별서를 찾았다. 이곳을 찾을 당시 정원은 잡초가 우거졌고 황량했다. 이때 세상을 놀라게 한 『동다기東茶記』가 처음 빛을 보았다. 표제 『강심江心』의 책자에 실린 「기다記茶」란 제목의 글이 그의 눈길을 잡았다. 초의 선사가 『동다송東茶訟』에서 한 단락을 인용한 이덕리(李德履, 1728 - ?)의 『동다기東茶記』가 원본이었다. 『동다기』는 그동안 다산의 저술로 잘못 알려졌다. 이 인연으로 고전학자의 발걸음은 강진을 향할 때마다 백운동 별서에 들렀다.
별서別墅는 살림집인 본체本第에서 떨어져 인접한 경승에 은거를 목적으로 조성한 제2의 주거를 일컫는다. 나의 발걸음은 보길도 부용동 윈림과 경북 영양 서석지에 발길이 닿았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과 강진의 다산초당은 마지막 답사처로 아껴두었다. 백운동白雲洞 별서는 월출산 옥판봉 남쪽 자락에 위치했다.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안운 마을에 자리 잡은 전통 정원이었다. 이곳은 입산조인 원주 이씨 이담로(李聃老, 1627 - ?)가 중년에 조성하여, 말년에 손자 이언길(李彦吉, 1684 - 1767)을 데리고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12대에 걸쳐 이어져온 유서 깊은 생활공간이었다.
백운동 별서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이었다. 다산은 1801년 강진에 유배 온 이후 18년간 이 고을에 머무르며 놀라운 학문적 성과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812년 다산은 제자들과 월출산을 유람하고 백운동 별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백운동의 풍광을 잊지 못해 다산초당으로 돌아와 『백운첩白雲帖』을 지었다. 『백운첩白雲帖』은 다산의 친필시 13수와 제자 초의에게 그리게 한 「백운동도 白雲洞圖」와 「다산초당도 茶山草堂圖」를 묶었다. 다산은 ‘백운동 12경’을 명명하고, 제1경 옥판상기玉版爽氣 -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에서, 제12경 운당천운篔簹穿雲 -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까지 그 아름다움을 시로 읊었다.
강진은 조선후기 차 문화 중흥의 진원지였다. 백운동 별서의 운당원 왕대나무 숲에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다산은 해배 후에도 제자였던 백운동의 5대 동주洞主 이시헌을 통해 차를 구했다. 다산 정약용의 제다법製茶法에 따라 만들어진 떡차였다. 이시헌은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차 관련 기록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이덕리의 『동다기東茶記』를 세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은 다산의 『백운첩白雲帖』의 서시에 해당하는 「백운동 이씨의 유거에 부쳐 제하다奇題白雲洞李氏幽居」(96 - 97쪽)의 전문이다.
白雲處士筮幽貞 백운처사 숨어사는 유정幽貞의 괘 얻으니
獻策君門不稱情 임금께 헌책獻策함은 뜻에 맞지 않는다네.
十畝松篁收地利 십무十畝의 솔과 대로 땅의 이익 거두고
半山樓閣枕溪聲 반산半山의 누각에서 물소리를 베개 삼지.
風流不減倪元鎭 풍류는 예원진倪元鎭만 못함이 전혀 없고
名勝皆聞願仲瑛 명승은 고중영願仲瑛에게 소문이 다 났다지.
爲有遺書在篋裏 상자 속에 남긴 글이 그대로 남아 있어
他年金石未渝盟 훗날에도 금석 같은 그 맹세를 안 바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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