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돌위에 새긴 생각

대빈창 2021. 7. 26. 07:00

 

책이름 : 돌위에 새긴 생각

지은이 : 정민

펴낸곳 : 열림원

 

내가 고전인문학자 정민을 처음으로 접한 책은 『미쳐야 미친다』였다. 표지글씨가 인상적이었다. 고암古岩 정병례 선생의 전각이었다. 열일곱 번째 만난 책의 표지 『돌위에 새긴 생각』도 선생의 전각이었다. 전각은 칼로 돌, 나무 및 금속 위에 문자를 새긴 다음 인주나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 나타난 인영을 감상하는 예술이었다. 내가 잡은 책은 2000년에 출간된 초판본이었다. 2012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희귀본 서가에서 원본을 마주한 저자는 2017년에 개정증보판을 냈다.

『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는 명나라 말엽 장호張灝가 옛 경전에서 좋은 글귀를 간추려 당대의 전각가들에게 새기게 해 엮은 책이었다. 첫 꼭지

 

好學者雖死若存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고,

不學者雖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비록 살았더라도

行尸走肉耳           걸어다니는 시체요 달리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에서 마지막 꼭지

 

士不識廉恥       선비가 염치를 알지 못하면

衣冠狗彘            옷 입고 갓 쓴 개, 돼지이다.

 

까지, 173방을 담았다. 친구 이덕무의 풀이글 『學山堂印譜記』에 붙인 서문에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 - ?)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에 총명함이 열리지 않은 자는 옛사람의 글을 무덤덤하게 보는 것이 병통이다. 대저 옛 사람은 절대로 범상한 말을 하지 않았거늘 어찌 무덤덤할 수 있겠는가? 유독 저 학산당 장씨의 인보를 보지 못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것이 인보인 줄만 알 뿐 천하의 기이한 문장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책은 아름다운 잠언집이었다. 짧지만 큰 울림을 주는 청언淸言 모음집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가슴 한 구석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전각은 서예와 조각, 회화와 구성을 포괄하는 종합예술이었다. 돌 하나하나의 구성과 포치는 물론 행간마다 옛 사람의 숨결이 담겼다. 짧은 글귀마다 선인들의 깊은 지혜와 자연의 이치, 욕심 없는 마음, 당당한 삶에 대한 추구가 새겨졌다. 이는 선비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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