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인문학자 정민의 청풍소언淸風素言을 잡다가 ‘독서종자讀書種子’란 말을 만났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 - 1689)과 맏아들 김창집(金昌集, 1648 - 1722)은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때 사약을 받았다. 세상을 뜨기 직전 부자는 자손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나는 부끄럼 없이 죽는다. 너희가 독서종자가 되어 가문의 명예를 지켜다오.’ 조선시대 명문가는 책 안 읽는 자손들이 나올까 두려워했다.
문곡의 아들들은 장남 김창집을 비롯해 ‘창昌’자 항렬로 당대 최고의 명사로 불리었던 ‘육창六昌’ 이었다. 조부는 척화파의 영수로 청淸의 심양瀋陽에 볼모로 끌려갔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 - 1652) 이었다. 영상세대를 위하여 부연하자면 김훈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남한산성>에서 이병헌이 분한 주화파의 영수 최명길의 대척에 섰던 김윤석이 분한 인물이었다. 청음의 형이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 - 1637) 이다. 위 이미지 〈仙源金先生殉義碑〉는 인천시기념물 35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를 찾는 이들은 여기서 한 번쯤 발걸음을 멈추었을까.
선원은 병자호란(1636, 인조 14) 때 종묘와 왕세자비, 왕자들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했다. 그의 나의 77세 때, 성이 함락되자 강화산성 남문에 올라 화약더미에 불을 붙여 자결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청음은 통곡했다. “어찌하여 우리 형은 수명을 다 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신체를 상하지 않게 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불행을 당하였는가.” 선원의 사후 4년 만에 신발 한 짝이 떨어졌던 4㎞ 거리의 선원 선행리에 충렬사를 세웠다고 한다. 충렬사忠烈祠는 선원을 비롯한 병자호란·신미양요 때의 충신 28분의 위패를 모셨다. 자료를 찾으며 알게 된 사실은 선원의 묘가 남양주시 와부 덕소에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먹고 김상용 순의비를 찾았다. 강화읍을 관통하는 중앙로를 타다 고려궁지 방면으로 꺾어 들었다. 선원김선생순의비 주변은 상전벽해로 강화답사1번지로 불러야 마땅했다. 제법 가파른 고개길을 다 오르면 고려궁지였다. 나이 먹은 벚꽃 가로수 터널을 벗어나자 강화산성의 북문 진송루鎭松樓가 나타났다. 비각 뒤편에 펼쳐진 널따란 잔디밭은 용흥궁 공원이다. 조선 한옥 형식의 서양 기독교 건축물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도령 철종(1831 - 1863)이 왕이 되기 전 19세까지 살던 용흥궁龍興宮이 비각 뒤편에 자리잡았다.
선원김선생순의비는 정조 때 7대손 김매순金邁淳이 건립했다. 원래 순의비는 남문 터에 있었다. 1976년 현재 위치로 비각碑閣을 옮겼다. 그때 1700년(숙종 26)에 당시 강화유수였던 김창집이 세운 구비가 발견되었다. 비각 안에 신·구 2기의 비가 나란했다. 순의비가 앉은 강화읍 관청리 언덕길은 〈별밤거리〉로 어두워지면 화려한 조명이 불을 밝혔다. 자유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보면 경박스러운 요즘 세태를 선생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선원의 죽음에서 강철의 이데올로그를 보았다. 그의 한시에서 따뜻한 인간미를 읽었다. 선원의 영혼은 강함과 부드러움의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었다. 그는 1608년, 인왕산 청풍계곡에 별업別業을 짓고 현판을 걸었다. 현판에 걸린 시편 중에서, 계절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풍광을 읊은 한시 12수에서 마지막 시편 臘月晴檐灸背(섣달, 눈 개인 아침 처마 밑에서 등을 덥히면서) 의 전문이다.
夜雪新晴朝日暾 밤새 내리던 눈이 갓 개이며 아침 해가 떠오르니
滿山瓊樹掩重門 온 산의 구슬나무가 사립문을 덮어 누르네
檐前穩負黃錦襖 솜바지 입고 처마 밑에 가만히 서 있으니
此味何由獻至尊 따듯한 이 맛을 어찌하면 나라님께 바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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