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말도의 가을

대빈창 2021. 9. 24. 07:00

 

말도唜島의 唜말은 새로 만든 한자로 末(끝 말)에 叱(꾸짖을 질)을 붙였다. 옛날 관청 보고가 항상 늦어 꾸지람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말도 주민들은 삼보12호 아침배로 볼음도에 하선하여 한 주일에 네 번 운항하는 행정선으로 갈아타고 섬을 드나들었다. 안개가 바다를 점령하거나, 바람이 거세 풍랑이 일면 그마저 결항되기 일쑤였다. 올 들어 말도에 첫 발걸음을 하게 됐다.

1박2일 농기계수리로 일행은 5명이었다. 볼음도에서 뻗어 나온 갯벌로 행정선은 바다 위에 반원을 그리며 말도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끝섬은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 Northern Limit Line)에 위치하여 남북의 긴장이 고조될때마다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먼 바다에서 말도로 접근하면 해병대·해군 경비대가 상주하는 우도偶島, 태극기 부대의 애국심(?)을 목소리 크기로 가늠하게 시험했던 함박도, 서해 작은 섬의 가난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을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기 희생양으로 삼았던 납북어민 사건의 은점도가 차례로 나타났다. 무인도 세 섬은 섬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며 일렬로 서서 말도로 다가서는 형국이었다.

서해가 조기 울음으로 시끄럽던 그때 그 시절이 말도의 전성기였다. 100여척의 선박이 몰려들었고, 파시가 서면 술집들이 늘어서서 흥청댔다고 한다. 60년대까지 작은 섬에 100여 가구가 살았다. 오래전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현재 농사짓는 두 가구가 말도의 3만평 벼농사를 지었다. 지하수를 퍼 올리는 관정농사였다. 작년 가을, 추수가 끝난 그루터기에 허옇게 내린 서리로 내린 들녘은 쓸쓸하고 적막했다. 몇 필지의 논배미가 둠벙 공사로 파헤쳐져 어수선했었다. 담수가 둠벙 턱밑까지 고여 찰랑거리고 있었다. 

올 여름 서해의 작은 섬들은 지독한 가뭄에 시달렸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마른장마로 간척지 논의 벼 끝이 시뻘겋게 타들어갔다. 지독한 갈증을 해소시켜 준 것이 둠벙이었다. 마을 끝자락 폐교를 지나 쌍바위로 향하는 고갯길에서 말도의 둠벙이 훤하게 내려다보였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흘러갔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절기는 백로를 지나 추분을 향하고 있었다. 말도의 들녘도 이제 가을 추수에 들어갈 것이다.

섬사람들은 추석이 다가오면 으레 망둥이 낚시에 나섰다. 망둥이가 씨알이 여물 때였다. 닦달한 망둥이를 말려 긴 겨울 내내 밑반찬으로 먹었다. 예전 볼음도와 말도를 오가던 평화호가 머물렀던 뒷선창에서 주민 서너 분이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웠다. 작년 가을 섬에 머물렀던 미국이민자 할아버지를 만났다. 노인은 황혼에 다다른 인생의 마지막을 조용한 말도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모자에 쓰인 문구는 ‘물반고기반’이었다.

서해 섬들의 가을 망둥이 낚시는 대낚시에 물엄소(민챙이)를 끼워 밀물에 넣으면 손이 바쁘게 망둥이가 끌려나왔다. 그런데 바다에 떠있는 야광찌가 붕어 낚시처럼 출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끌려 나온 고기는 손바닥보다 작은 도미 중치였다. 도미는 가시가 많은 고기였다. 닦달해서 채반에 올려 햇빛에 꾸덕꾸덕 말려 튀기거나 구우면 그렇게 맛있을수 없다고 이구동성이다. “준치, 밴댕이처럼 가시 많은 고기가 맛있는 법이라고.” 젊어서 미국으로 건너가 죽음을 앞두고, 고국에 돌아온 노인의 소일거리 낚시가 말도의 가을낚시 어종을 바꾸었다. 끝섬 낚시문화의 혁명적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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