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대빈창 2021. 11. 16. 07:30

 

책이름 :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지은이 : 김륭

펴낸곳 : 문학동네

 

시인 김륭(金隆, 1961 - )은 울진 콩을 주제로 한 지역음식총서 1권에서 만났다. 시인 32명이 참여한 합동시집 『밤새 콩알이 굴러 다녔지』였다. 이름에서 와 닿는 기묘한 기시감과 코믹스런 표제에 끌려 시집을 손에 넣었다. 시인의 본명은 김영건이었다. 그는 한 시인의 사인을 받고 나서, 지리산자락 빈집에 3년간 틀어박혀 시를 썼다고 한다. 신춘문예 계절이 돌아오면 산마을에서 내려와 함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문을 구했다. 신문에서 자신의 당선소식을 접한 그날 산을 내려왔다.

2007년 강원일보와 문화일보에 동시와 시가 동반 당선되어, 마흔일곱에 문단에 나왔으니 늦은 셈이었다.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 두 권의 동시집은 제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다. 두 번째 시집 『원숭이의 원숭이』(문학수첩, 2018)를 제껴 놓고 나는 첫 시집을 집어 들었다. 시인의 쉰둘에 첫 선을 보인 시집은 부 구분 없이 55편이 실렸다. 해설은 최현식(문학평론가)의 「‘뒤죽박죽 박물지(誌)’의 시적 규약과 윤리」였다.

시집의 뒷 표지를 덮고 나서도 나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초판이 출간된 지 10여 년이 다 된 묵은 시집을 펼쳤지만 아둔한 나는 시인의 속내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으며 간신히 시편 언저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김륭의 언어는 ‘뒤죽박죽’의 생산이 아닌 그것의 응시와 개성을 지향한다.······. 뒤죽박죽 세계의 주요한 주체와 대상이 가족과 여자, 아이, 비근한 자연물에 주어지며, 그것들 사이의 관계전도 혹은 파탄이 일상의 영역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101쪽)  마지막은 평생 빨레를 해온 치매 걸린 할머니를 읊은 표제시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42 - 43쪽)의 1·2·6·7연이다.

 

두 살배기 계집아이로 돌아가기로 했어 / 어린 살구나무가 바지에 오줌 싸듯 / 울어보기로 했어 // 엄마 몰래 꿀꺽 비누를 집어삼킨 / 계집아이, 똥 기저귀 차고 화장실엔 왜 끌려가나 / 끌려가서 울긴 왜 우나

(······)

생쥐처럼 비누 갉작대는 치매 할머니 / 똥기저귀 차고 내려다보는 저기, / 산등성이마다 동그란 무덤들 / 전생을 두들겨도 뽀얗게 우려낼 수 없는 / 영혼의 엉덩이들 // 살구나무에 옹알옹알 살구비누 열리고 / 백발성성해진 계집아이 하나 엉엉 울고 있어 / 빨래 방망이 하나 치켜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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