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대빈창 2021. 11. 19. 07:30

 

책이름 :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지은이 : 김민정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활자중독자로 나의 주변에 항상 두 권의 책이 대기했다. 부피가 있고 행간을 짚어가는 책은 여유로운 시간에 독서대에 올렸다. 가벼운 에세이와 시집은 자투리 시간에 잡을 요량으로 휴대했다. 가벼운 시집이니만치 한 손으로 시집을 펼쳐들면 앞을 지나는 이는 자연히 표제에 눈이 갈 것이다. 상대방과 민망한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는 난감을 피하기 위해 나는 시집을 독서대에 올렸다.

시인의 말에 따르자면 나의 머릿속은 ‘그것’이 가득 찼다. 더군다나 차례를 훑어보니 「서둘러서 서툰 거야 서툴러서 서두른 게 아니고」, 「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가 유독 눈에 띄었다. 나는 표제를 보고 페니스왜소증과 직업여성을 떠올렸다. 나의 감성이 유독 음탕한 것인가. 시인은 『PAPER』 2019년 가을호에서 말했다. “문학을 향한 제 열망과 욕심에 비해서 문학 본령의 구멍은 늘 너무 작았기 때문에 먼길을 돌아가고 있는 것 같고, 자꾸 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헤어졌습니다’가 아니라 ‘헤어지는 중’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와중이라는 자체가 ‘시의 존재감’과 같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시집의 초판1쇄 발행일은 2019년 12월이었다. 시인은 1999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20년 만에 나온 네 번째 시집이었다. 나는 시인의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문학과지성사, 2009), 『아름답고 쓸모없기를』(문학동네, 2016)에 이어 세 번째 잡은 시집이었다. 그동안 품절되어 구할 수 없었던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가 ‘문학동네포에지’로 재출간되었다. 쓸모없는 강박적 편집증에 휩싸인 나는 시인의 데뷔시집을 언젠가 손에 넣을 것이다.

시인은 마흔네 살의 겨울, 44편의 시가 담긴 네 번째 시집을 펴냈다. 모든 시편들의 부제는 ‘곡두’로 일련번호가 매겨졌다. ‘곡두’는 눈 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이다. 문학계가 초상을 많이 치렀던 그 해에 시집이 나왔다. 김윤식·황현산 문학평론가, 최인훈 소설가, 허수경·박서영·배영옥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시인은 3일 동안 책상에 붙어 앉아 먹고 자면서 시만 써내려갔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줄줄이 시가 쏟아졌다고 한다. 마지막은 부제 ‘곡두 1’이 붙은, 시집을 여는 첫 시 「1월 1일 일요일」(9쪽)의 전문이다.

 

낮에는 도끼와 톱을 봤고 / 밤에는 꿩과 토기를 봤다. //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 / 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 하루 종일 눈 내렸다. / ‘머리’로 가 붙을 수 있는 대목은 다 / 덮이었다. / 더도 덮일 것이었다. // 쑥차 마시면서 / 쑥대머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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