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쪽빛 문장

대빈창 2010. 9. 7. 07:28

 

책이름 : 쪽빛 문장

지은이 : 고재종

펴낸곳 : 문학사상사

 

시인 고재종은 1984년 '동구밖집 열두 식구'로 실천문학사를 통해 등단한 중견시인이다. 현재까지 7권의 시집과 2권의 산문집을 내 놓았다. 가난하지만 현실에 꼿꼿하게 맞서는 건강한 농민들을 그린 농민시와 자연 만물에서 우주를 읽는 생태시의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나와의 인연은 이렇게 늦께야 만났다. 시와는 거리가 먼 무딘 감수성이지만, 80년대와 90년대 초 가뭄에 콩나듯 나의 손에 잡힌 시집은 노동시편이었다. 박노해의 '새벽의 노동',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등 이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손에 넣은 농민시편은 신경림, 김용택, 박형진 등 이었다. 독학으로 자기 시세계를 개척한 농민시인 고재종을 익히 귀동냥했으면서도 이제야 시집을 펼쳐 들었다. 시집 '쪽빛 문장'은 시인의 7번째 시집으로 2004년에 문학사상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집이라면 '창비',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라는 출판사를 떠올리던 나에게 '문학사상사'는 생경하다. 그리고 이 시집을 손에 넣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여러 사람 손을 거쳐야만 했다. 올초까지만 해도 '풍경이 있는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에 가끔 눈길을 주곤 했다. 주말 아침밥을 먹기전 TV를 틀면, 예술인들이 고향이나 인연을 맺은 고장을 기행하면서 그 땅의 문화재를 소개하거나, 서민들의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내게는 그런대로 괜찮은 프로그램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심야시간대로 옮겨가 나처럼 초저녁 잠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벗어나 버렸다. 그때 풍경있는 여행지는 '담양'이었다. 소쇄원이나 명옥헌, 식영정 등의 정자와 죽세공 작업과정을 보여주던 카메라 앵글이 시골 5일장의 북새통을 비추면서 나레이터가 시를 낭송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고재종의 시 '돼지국밥집이 붐비는 풍경' 이었다. 브라운 관을 개미떼처럼 기어 오르는 시구처럼 나의 기억은 그 시절로 빠르게 리와인드되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란 이처럼 사소한 일(시집을 손에 넣기) 도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웬걸! 나의 단골 온라인 서적은 품절이었다. 미안함을 무릎쓰고 10여년 전 읍내 단골책방에 전화를 넣었다. 시집은 가격이 너무 저렴하지 않던가. 머뭇거리다 놓친 또다른 시집 '하이쿠 선집'과 함께 주문했다. 한달 여만의 본도 발길끝에 손에 넣은 시집을 이제야 펼쳐든다. 시집은 모두 62편의 시로 이루어졌는데, 1부 '고독 시편'과 2부 '오솔길의 몽상'은 각 15편 그리고 3부 '농민시편'과 4부 '사랑 시편'에 16편 씩이 실렸다. '돼지국밥집'에 대한 나의 기억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창시절 학술조사단에서 나는 땅이름반에 속해 있었다. 그해 답사지역은 경북 청송이었는데, 선발대로 나는 예닐곱 명의 학우들과 예비조사에 나섰다. 전두환정권 시절, 청송은 사회보호교도소가 있었던 궁벽한 오지였다. 군청이 자리잡은 읍내라고는 하나 관공서 단층건물 몇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면소재지를 찾더라도 모래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따라 걸어야만 했다. 외떨어진 산골의 지리를 익히다 홀로 떨어진 나는 허기진 속을 부여잡고, 어느 면소재지 시장통으로 들어섰다. 지금도 기억이 뚜렷하다. 일제 식민지의 잔재인 적산가옥이 일렬로 늘어선 시장통 입구에 국밥집이 있었다. 가마솥에서 돼지 내장이 익어가면서 물큰내를 진하게 풍기고, 김이 자욱한 솥안을 아주머니가 바가지로 휘저었다. 변변한 상호조차 없던 그 집의 돼지국밥 맛을 아둔한 나로서는 지금도 표현할 수 없다. 지금도 나는 끼니 때를 놓쳐 허기가 몰려오면 국밥집부터 찾는다. 하지만 옛맛은 나의 기억속에서나 존재했다. 시골 5일장의 북새통이 배경으로 깔리고, 돼지국밥집을 소재로 한 시낭송을 들으며, 나의 혀끝은 25년전의 산촌오지 청송의 시장통 국밥집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나는 시집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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