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이주헌의 아트 카페

대빈창 2010. 9. 14. 06:34

 

 

책이름 : 이주헌의 아트 카페

지은이 : 이주헌

펴낸곳 : 생각의나무

 

내방 책장 한칸은 이주헌의 저작물이 차지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이 지난 15년간 펴낸 미술비평과 다양한 형식의 미술교양서다. 도합 18권이다. 며칠전 얼핏 온라인 서적을 곁눈질하니, 이 책은 벌써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작년 3월 1쇄를 구입했는데, 1년 6개월만에 개정판이 선을 보인 것이다. 위책 이미지는 초판본 책표지다. 내가 너무 책욕심이 과했구나. 책장에는 아직 읽지못한 '지식의 미술관'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다른 책을 뒤로 미루고 서둘러 책갈피를 연다.

책은 5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 '화폭이 담긴 세상'은 오늘의 시각으로 해석한 서양의 고전이고, 3장 '길을 떠난 이는 길을 만난다'는 이땅 미술계의 중진화가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담았고, 2장 '이야기가 있는 미인도'와 5장 '미술이 찬미한 리더'는 그림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3장 '그림은 소통의 징검다리'는 미술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최근 시선이 담겨있다. 나의 눈길은 1장에서 '소외의 그늘로 향한 붓'에 오래 머물렀다. 오노에 도미에의 '삼등열차'는 사회적 약자의 침울한 정서가, 뭉크의 '병든 아이'는 불행한 화가의 가족사가 오버랩되고, 모딜리아의 '젊은 여인'은 예술가가 겪을 수밖에 없는 소외가, 그리고 안나 메릿의 '쫓겨난 사랑'은 화가로서의 재능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핍박받는 아픔이 잘 나타나 있다.

책에는 한국화가가 총 9명이 소개되었다. 그중 김병종과 이호신의 그림이 반가웠다. 그림들은 앞서 단행본으로 잡았던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과 '그리운 이웃은 마을에 산다'에서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글로 세상을 드로잉한 나의 드로잉집'이라고 소개한다. 드로잉은 우리말로 '소묘'라고 할 수 있다. 연필, 목탄, 철필 따위로 사물의 형태와 명암을 위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나의 미술과의 첫 만남도 '소묘'였다. 고1 첫 미술시간. 새로 부임한 선생님은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흰 얼굴의 귀공자 스타일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로 말미암아 선생님의 손목은 푸른 정맥이 도드라졌다. 스케치북을 반으로 나눠 한면은 거울을 보고 자화상을, 나머지 면은 왼손을 소묘하는 것이 한학기 미술 실습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흉터에 앉은 딱지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나의 손 드로잉을 보고 선생님은 웃으셨다. 그리고 지우개로 그 흉터를 직접 지우셨다. 마티스의 '금붕어'를 수채화로 따라 그린 나의 그림을 보고 선생님은 마음을 굳혔을 것이다. 그날부터 본격적인 석고상 데생에 나는 매달리게 되었다.

작은형과 나는 세살 터울이다. 작은형은 시골학교지만 초등과 중등을 다니면서 미술상을 휩쓸었다. 그런데 나의 그림은 영 빛을 못 보다가 고교에 진학하여 김광현 선생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뒤늦은 재능의 발견이었지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중동무이된 나의 미술과의 인연은 이렇게 도판으로나마 희미한 연줄을 잇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시골 아이들은 미술에 대한 가슴아픈 옛 추억이 하나씩은 서려있을 것이다. 미술시간이 있는 날이면 엄마는 항상 허둥대셨다. 등교하면서 재료를 구입할 돈을, 아침에야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집안에 가욋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웃집에 돈을 빌리러 엄마는 황급히 뛰어다니셨지만, 그집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학우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 싫은 나는 학교를 안가겠다고 땡강을 놓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치는 새끼를 내려다보는 어미의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가슴을. 나는 지금 얼마만큼이나 그 아픔을 헤아릴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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