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24절기에서 열여덟 번째 절기 상강霜降을 이틀 앞두고 있었다. 상강은 한로寒露이후 쾌청한 날씨가 이어지며 밤에 기온이 떨어져 서리가 내린다는 늦가을의 절기였다. 해가 많이 짧아졌다. 아침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일출은 반시간을 더 기다려야했다. 섬의 중앙에 솟은 봉구산을 넘어 햇살을 흩뿌리는 느리 마을의 아침은 더욱 늦었다. 손전화의 손전등으로 발밑의 어둠을 밝히며 봉구산 자락 옛길을 탔다. 대빈창 해변에 닿았다. 물때는 사리(일곱물) 이었다. 볼음도 군부대의 하늘이 불빛으로 훤했다. 나는 바다에 드리워진 금빛물결을 보며 아! 저것이 ‘달빛커튼’ 이구나 중얼거렸다.
우리나라 펜션 상호에서 가장 낭만적인 이름 〈달빛커튼 드리운 바다〉는 시인 함민복의 작명이었다. 나는 산책에서 돌아와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 『미안한 마음』(풀그림, 2006)을 꺼냈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꼭지 「수작 거는 봄」(178 - 181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랫집 사는 규호가 왔다.
탕!(대문 닫히는 소리에 놀라는 봄)
(······)
농민 후계자 도깨비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가고,
그렇다. 화도 동막의 펜션 주인은 농민후계자였다. 벌써 20여 년 전 저쪽의 세월이었다. 시인은 바다를 바라보고 새로 앉은 이국적 펜션에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도 펜션 조경에 한몫 거들었다. 주인은 나의 말을 따라 펜션 뒤편에 연지蓮池를 팠다.
시인이 건넨 책의 자필서명은 2009. 가을이었다. 책이 출간되고 3년이 지났다. 그랬다. 직장 선배는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시인이 강화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나의 친구라는 사실을 무척 기꺼워했다. 막 출간된 따끈따끈한 산문집은 한 권 밖에 여유가 없었다. 시인은 나의 말을 듣고 선배에게 산문집을 증정했다. 책을 받아 든 선배는 몇 쪽 뒤적이다 후계자 규호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시인은 사소한 일도 이렇게 멋진 글로 만든다니깐!"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세월이 흘렀다. 나는 20년 만에 ‘달빛커튼’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보름달이 잠시 구름 속으로 스며들었다. 불을 밝힌 작은 어선 한 척이 달빛커튼 속에 잠겼다가 다시 나타났다. 바위 벼랑 반환점이 가까웠다. 바다는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새벽의 푸른 기운이 가시면서 멀리 바다 위의 검은 음영이 점차 제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마리의 기러기가 물위에 떠 있었다. 인기척에 녀석들은 고단한 날개를 펼칠 것이다. 나는 바위벼랑에 손을 터치하는 산책습관을 오늘 만큼은 그만두기로 했다. 물위에 떠있는 기러기들의 휴식을 방해하고 쉽지 않았다. 뒤돌아서 점차 흐릿해져가는 달빛커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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