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지은이 : 박노자
펴낸곳 : 나무연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사이(1918-1939년)를 전간기戰間期라고 한다. 이 시기는 근대 자본주의의 최대 위기의 시대였다. 대공황으로 인한 빈곤과 불평등은 민중의 생존을 위협했다. 제국주의의 침탈로 전세계에서 혁명과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세상을 바꿀 기회였다.
혁명사상 마르크스주의가 이 땅에 유입된 경로는 세 가지였다. 혁명의 나라 소비에트에서 직접 배우고 경험한 러시아 디아스포라 2세들과 모스크바에 유학한 혁명가들이었다. 다음은 식민모국 일본에 유학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고 조국으로 돌아온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마지막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설립한 경성제국대학 출신들로 토종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은 표제 그대로 10명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평전이었다. 조국의 앞날을 고민하던 선각자들은 사회주의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었다. 신남철(申南澈, 1907-1958년)은 국내파로 마르크스 저작을 독일어 원전으로 배우면서 조선의 문제를 고민했다. 그는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 혁명적 전위가 만들어지는 상황을 왕양명의 지행합일과 결부시켜 설명했다. 해방 후 월북해 김일성 종합대학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주류에서 밀려난 뒤 병사했다.
박치우(朴致祐, 1909-1949년)는 경성제대 철학과를 거치며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파시즘의 뿌리를 해부했던 이론가였다. 1947년 월북하여 빨치산 양성기관 강동정치학원 정치부원장을 지냈다. 1949년 인민유격대로 태백산 지구로 남하했다가 토벌대에 사살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임화(林和, 1908-1953년)는 시인·비평가로 열아홉 나이에 주요 일간지에 글을 썼던 다재다능한 천재였다. 그는 유기적 문예를 주창하여 민족문학과 계급문학의 이중적 과제를 고민했다.
김명식(金明植. 1890-1943년)은 제주 양반가 출신으로 식민지시대 최고의 명필이었다. 그의 삶은 조선 사회주의자 1세대들의 지적 압축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조선은 1890년대까지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불과 20년 뒤 사회주의자들이 출현했다. 한위건(韓偉健, 1896-1937년)은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한 이념형 운동가였다. 그는 님 웨일즈Nym Wales의 『아리랑』의 1937년 중국 연안에서 김산이 심사를 한, 중국 공산당 한인부韓人部 가입신청을 한 내지에서 온 활동가 한씨였다. 조선·일본·중국에서 활동한 운동가로 그의 급진적 대중노선은 중국공산당의 노선에 여파를 드리웠다.
남만춘(南萬春, 1892-1938년)과 김만겸(金萬謙, 1886-1938년)는 조선공산당 결성의 핵심 분파 화요일을 이끈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을 이끈 주요 활동가였다. 그들은 볼셰비키에 입당하고 조선 사회주의 운동에 이바지한 한국 최초의 디아스포라 지식인 사회주의자였다. 최성우(崔聖禹, 1898-1937년)도 재러조선인 2세로 코민테른 중심에서 활동했다. 양명(梁明, 1902년-?)은 북경대학에 유학하며 급진적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조선공산당을 거쳐 상해와 모스크바를 무대로 활동한 그는 1935년 이후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그의 알 수 없는 죽음에서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삶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 수 있다.
허정숙(許貞淑, 1908-1991년)은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의 주인공으로, 일제강점기 민족변호사 허헌(1884-1951, 김일성대학 초대총장)의 딸이었다. 그녀는 조선의 엘리트 여성으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였다. 북한의 정권 초기 허정숙은 급진적인 여성 관련 정책을 입안했다. 1946년 양성평등법이 제정되었고, 매매춘도 금지되었다. 일부일처제가 철저했고 이혼이 자유로웠다. 산모의 휴가 기간은 출산 전에는 30일, 출산 후에는 60일까지 보장되었다.
10인의 사회주의자에서 허정숙을 제외하고 대부분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의 삶은 수배, 체포, 살인적인 고문, 감옥살이, 만기출소, 새로운 수배자 신분으로 지하생활이 반복되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