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악의 평범성

대빈창 2022. 7. 7. 07:00

 

책이름 : 악의 평범성

지은이 : 이산하

펴낸곳 : 창비

 

1963년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년)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그녀는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년)의 공개 재판을 참관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히틀러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적 사건으로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홀로코스트를 진두지휘한 인물이었다. 그는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강제 추방시켰고 가스실에 몰아넣었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아이히만은 리카르도 클레멘스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하고 아르헨티나에서 15년을 숨어 살았다.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는 아이히만을 이스라엘로 압송하고 전쟁범죄 피고인으로 법정에 세웠다. 33번에 걸쳐 진행된 공판은 세계 최초로 37개국 TV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월급을 받으면서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다.”

 

신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법 앞에서는 무죄라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의사들은 그를 정신 감정했다.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그는 좋은 이웃이자 아버지로서 상당히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 정상인으로 판명되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마지막 문장은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 없이 사는 것, 그냥 시키는대로 돌아가는 인생의 무사유가 더 위험하다.”고 경계했다.

이산하(1960년 - )의 본명은 이상백이다. 시인은 1979년 경희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동인지 『시운동』시절, ‘이륭’이라는 필명을 썼다. 『죽음의 한 연구』의 소설가 박상륭을 흠모했다. 스물일곱살 때 제주 4・3항쟁의 진실을 폭로한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녹두서평』 창간호에 발표했다. 수배와 수감, 고문의 세월이 이어졌다. 「버킷리스트」에서 수배중이던 시인을 은닉・묵인해 준 선의와 신념을 가진 119명의 사람들을 가나다순으로 실명을 공개했다.  시인은 『한라산』으로 국가보안법 올가미가 씌어져 옥고를 치렀다. 긴 시간 절필 끝에 두 번째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1999)을 발표했다. 그리고 22년의 시간이 흘렀고, 신작시집 『악의 평범성』이 출간되었다.

4부에 나뉘어 71편이 실린 시집은 이 땅의 현대사가 참혹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한라산 필화사건의 물고문(이산하), 한국전쟁 때 미군 지프에 깔려죽은 인민군의 몸에 새겨진 바퀴 자국을 뜻하는 지퍼헤드(경멸적인), 독방에서 자살을 이겨내게 해준 햇빛 한 줌(신영복), 경북 봉화의 전우익 선생,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반공・친공 포로간의 살인극, 사법살인으로 젊은이 8인의 목숨을 앗아 간 인혁당 사건, 87년 국민항쟁 도화선이 된 박종철・이한열의 죽음,  친일인명사전 임종국 등. 표제시 「악의 평범성」은 3편의 연작시가 실렸다. 5・18광주항쟁과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악성 댓글,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는 가난하고 소박한 생을 최고의 삶으로 꿈꾼 채식주의자, 지진 여진의 공포 속에서 매장을 수습하는 비정규직 학생과 아기엄마들(정규직은 정시퇴근).

시인은 말했다. “세상은 불치병에 걸렸다. 못 고친다. 인간과 구조 자체가 불치병에 걸렸다. 나치 간부들은 모두 집에 가면 평범한 가장으로서 자식들을 걱정하고 가정의 행복을 중요시했던 착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의 고문기술자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가끔씩 인간이 될 뿐이다.” 마지막은 『한라산』의 「서시」 일부분이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 (······) /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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