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지은이 : 송찬호
펴낸곳 : 민음사
오래전 일이었다. 강화도 여우고개 아래 소담마을에 사는 시인친구와 점심을 먹고 마을 길 건너 한옥 카페에서 들어섰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친구가 손꼽은 시인은 충북 보은의 송찬호였다. 시인은 고향에서 대추농사를 짓는 전업시인이었다. 나는 그동안 시인의 네・다섯번째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분홍 나막신』(문학과지성사, 2016)을 잡았다.
시인은 계간지 『문학과지성』이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자, 제호를 바꾸어 무크지로 간행된 『우리 시대의 문학』 6집에 「금호강」 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시인은 ‘고전적 시학을 바탕에 깔고 고도의 상징과 관념이 조화’를 이룬 작품을 써왔다고 평가받았다.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을 잡고 묵은 시집 두 권을 손에 넣었다. 그중 하나가 출간된 지 30년이 넘은 송찬호의 첫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 1989)였다.
대가리를 꼿꼿이 치켠 든 독 오른 뱀 앞에 / 개구리 홀로 얼어붙은 듯 가부좌를 틀고 있다 -「문門 앞에서」
옷을 넣어 보내면 금방 피고름 빨래가 되어 내려왔다 -「바구니」
개들이 물어뜯던 말, / 사육된 말 -「말의 폐는 푸르다」
그 이튿날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 그해 겨울 동안, / 그들은 아주 짧은 생을 살다 갔다 -「설국雪國」
사형! 하고 언도가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 죄지은 자들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 기우뚱 기우는 어떤 삶의 기록」
그렇게 붉게 물들였다, 말까지도 / 빨갱이로, -「동물원 창살 너머 꽃 한 마리」
그의 목이 버둥거리는 그의 몸뚱이를 끌어올렸어, 밧줄을 걸어 -「가을의 무늬」
나는 시편들을 읽어 나가다 ‘인혁당사건人革黨事件’을 떠올렸다. 박정희는 유신반대 투쟁을 벌이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배후・조종 세력으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해 국가보안법과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기소했다. 고문・증거 조작으로 누명을 씌워 기소된 그들에게 독재 권력의 하수인 사법부는 대법원 확정 판결후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박정희는 70년대까지 잔존했던 대구 지역의 진보세력을 간첩 누명을 씌워 살해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김용원, 하재원, 우홍선, 이수병, 여정남 8인은 대구에서 30분 떨어진 경북 칠곡 현대공원묘지에 잠들어있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사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의 조작을 밝혀냈고, 무죄를 선고했다. 시인은 70년대 말 유신독재의 암흑기에 대구 지역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하는 감수성 예민한 문청이었다. 마지막은 시집을 여는 첫 시 「금호강」(9-10쪽)의 부분이다.
그 강은 어둠의 천국이다 / 3공단의 교대 근무가 이루어지는 아침 혹은 저녁이면 / 꺼칠한 어둠들이 굴뚝으로 퍼져 나와 / 으슥한 하수구에서 몰려나온 어둠들과 살 섞으며 / 꾸역꾸역 흘러가 어둠강이 된다 / 그 강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생명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 어둠이 대낮부터 활개 치는 이 무법 지대에는 / 밤 화장을 끝낸 어둠들이 벌 떼같이 몰려나와 / 매독같이 화사한 웃음을 흘리며 행인을 유혹하여 / 만신창이로 만들기도 하고 / 몇몇 심심한 어둠들은 부녀자를 겁탈하고 / 털린 자궁 속에 기형아를 쑤셔 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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