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다산의 재발견
지은이 : 정민
펴낸곳 : 휴머니스트
다산의 저작은 후손의 손에 의해 1934-1938년에 걸쳐 154권76책 『여유당전서』로 집대성되었다. 1970년 『여유당전서보유』 5책이 추가되었다. 오랜 기간 다산의 발자취를 더듬어 온 고전인문학자 정민(鄭珉, 1961년 - )은 집요하게 다산의 자료를 정리하고 발굴했다. “다산 친필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어디든 찾아갔다.······. 손에 못 넣으면 안절부절 몸이 달았다.”
고전인문학자가 찾아 낸 다산의 친필 편지가 150여 통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1801-1818년의 강진 유배시절, 그의 나이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에 교유했던 수많은 제자, 승려, 자녀에게 쓴 시, 산문, 그림을 찾아냈다. 다산문집에 없는 친필 편지는 다산의 성정, 편지를 쓴 사연, 편지를 쓴 날짜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저자는 이를 연구・정리하여 22개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다산의 재발견』은 ‘다산의 강진 강학, 제자 교육’, ‘다산의 사지 편찬과 불승과의 교유’, ‘다산의 공간 경영과 생활 여백’, ‘다산 일문의 행간과 낙수落穗’ 4개 영역으로 분류했다. 다산의 면모를 재구상한 다산학茶山學이었다.
다산은 제자 교학방식을 단계별, 전공별, 맞춤형, 실전형, 토론형, 집체형 교육 단계에 따라 제자를 길러냈다. 『다산여황상서간첩茶山與黃裳書簡帖』은 다산이 황상에게 수십 년에 걸쳐 보낸 편지를 수신인 황상이 하나하나 모아 만년에 한 권의 소책자로 묶었다. 신헌의 『금당기주』에 다산이 초의에게 준 글이 무더기로 실렸다. 1813-1814년 사이에 써 준 글들이었다. 『금당기주』는 신헌이 초의가 보관하고 있던 여러 두루마리와 수창시문첩을 베낀 것이다. 다산은 18년 강진 유배기간 동안 초의草衣 의순(意恂, 1786-1866)을 비롯한 승려 제자 여럿을 두었다. 다산의 승려 교학 방식은 깨달음을 유도하면서 각성과 분발을 촉구했다.
다산이 대둔사 승려 은봉隱峰에게 준 친필 편지 7통이 남아있다. 은봉은 대둔사의 시원암始原庵인 만일암挽日菴을 중수한 수 다산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다산의 만일암을 위해 지은 글 3편, 만일암 관련 친필 2점이 전했다. 『매옥서궤梅屋書匭』는 다산의 친필서간첩으로 다산의 편지 13통, 맏아들 정학연의 편지 2통, 모두 15통의 편지를 합첩하여 만들었다. 『견월첩見月帖』은 다산과 혜장 사이에 주고받은 시문과 편지를 모았다. 필첩은 두 개로 17장 분량의 『견월첩』은 1805년 6월 2일부터 7일까지 닷새 동안 다산이 고성암에 머물 때 혜장에 준 내용들로 시 4편과 편지 1통이다. 24장 분량의 『견월첩』은 혜장이 다산에게 준 17통의 편지로 다산의 아들 정학연의 글씨다. 『백열록』에 실린 「산거잡영」 24수는 1817년 가을 이후 1818년 정초 사이에 지어졌다. 초당 시절 주변의 공간 배치와 다산의 생활상을 반영했다. 최근 발견된 다산의 친필 편지 2통은 해남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된 1천불 중 768좌의 부처가 1817년 일본 나가사키까지 표류했다가 어렵게 돌아온 것을 증언했다.
다산의 이상주거론은 벼슬을 떠난 사족의 자족적 생활공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다산송철선증언첩茶山送鐵船贈言帖』은 1834년 대둔사 승려 초의와 철선이 금강산 여행을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갈 때 다산이 철선 혜즙을 위해 써 준 친필 증언첩이다. 다산 초당을 그린 그림은 두 폭으로 초의가 그린 〈다산도〉와 1939년 일본인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가 그린 〈다산선생거적도茶山先生居跡圖〉가 전한다. 1813년 6월 12일과 6월 15일 사이에 쓴 친필 서첩 3종은 이성화에게 전해졌다. 당시 유배지에서 해배를 기다리던 심정과 그가 꿈꾼 이상적 삶이 드러난 작품이다. 다산은 온 가족을 추위와 굶주림에 떨게 하면서도 학문을 논하고, 나라 일을 말하는 자들을 천하고 가증스럽게 여겼다. 다산은 두릉에서 보내 온 빛바랜 낡은 치마로 두 점의 〈매조도〉를 그렸다. 두 작품은 거의 같은 시기, 똑같은 크기에 비슷한 구도로 그려졌다. 1813년 7월 결혼하는 큰 딸을 위해, 8월에 소실에게서 딸을 얻은 감회가 나타난 그림이었다.
『유산공후인시첩酉山箜篌引詩帖』은 1858-1859년 사이에 지어진 정학연, 정대번, 김각, 월사의 작품으로 모두 초의에게 써 준 것이다. 「유두륜산기 遊頭輪山記」는 1805년 12월 24일부터 27일까지 3박4일간 정학연이 황상과 혜장을 따라 대둔사로 가서 두륜산 일대를 유람한 기록이다. 다신 친필의 『수종시유첩水鍾詩遊帖』은 다산의 아들 정학연・학유 형제와 초의 등 몇 사람이 겨울 눈보라를 헤치고 수종사로 놀러가 사흘을 머문 기록이었다. 황상은 1818년 즈음 백적동에 들어가 원림을 경영했다. 1848년 살림집 뒤편 계곡 상류에 자기 혼자만의 거처인 작은 초막 일속산방一粟山房을 짓고 은거했다. 다산초당・일지암・일속산방은 모두 다산의 기획과 영향 아래 조성된 전통 원림이었다. 마지막은 초의에게 준 다산의 공부하는 마음가짐, 즉 위학삼요爲學三要이다.(146쪽)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혜慧와 근勤과 적寂 세 가지를 갖추어야만 성취함이 있다.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한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가 없다. 고요하지 않으면 온전히 정밀하게 하지 못한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하는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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