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죽음의 푸가

대빈창 2022. 11. 18. 06:38

 

책이름 : 죽음의 푸가

지은이 : 파울 첼란

옮긴이 : 전영애

펴낸곳 : 민음사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은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독문학자 전영애의 『시인의 집』을 잡고, 내처 시선집을 손에 넣었다.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 첼란은 루마니아 체르노비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1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체르노비츠는 게토(유대인 거주 지역)로 묶였고, 부모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시인은 가스실 처형 직전 우연히 목숨을 건졌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의 말이다. 전후 독일문단은 서정시를 쓸 수 없다는 의식이 지배했다. 유대인 학살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했다. 세계가 무너졌는데 인간이 세계를 서정적인 노래로 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쓰라린 고통을 침묵의 시로 표현했다. 그는 극도로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시어로 아우슈비츠를 서정시로 그려냈다. 아도르노는 다시 말했다.

 

“첼란의 시는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 수 없다는 말은 잘못이다.”

 

첼란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기억을 한평생 안고 살아가야 했던 비운의 시인이었다. 시인의 가장 근원적인 비극은 자신의 삶에 가혹한 상흔을 남긴 ‘살인자의 언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데 있었다. 첼란에게 언어와 현실은 불가해한 관계였다. 인간성이 말살된 참혹한 시대의 쓰라린 고통을 침묵의 시로 표현했지만 시인은 끝내 구원을 얻지 못했다. 1970년 그는 파리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시선집은 시인의 아홉 권의 시집에서 118편의 詩를 추렸다. 산문은 1958년 브레멘 문학상 수상연설, 1960년 게오르크 뷔히너 문학상 수상연설 「자오선」, 「산 속의 대화」는 엥가딘에서 아도르노와의 어긋난 만남 이후 쓴 그의 유일한 산문이었다. 「자오선」은 1945년 이후 독일문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시론 중의 하나였다. 첼란의 대표시는 단연 「죽음의 푸가」였다. 푸가는 여러 개의 성부가 있어 그 하나가 울린 주제를 다른 성부가 화답하며 변주하는 식으로 구성되는 음악 형식이었다. 시는 푸가 형식에 상응하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첫째 연의 아홉 행이, 음악 형식 푸가의 발단부에 해당되었다. 「죽음의 푸가」(40-42쪽)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이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 한 남자가 집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 (······) //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독문학자는 시선집을 엮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1980년 파울 첼란의 시 작품을 번역하면서 역사의 고통이 굳어진 목소리, 상흔을 지닌 풍경 등을 표현하는 시어 자체를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첼란의 ‘아우슈비츠’에 우리 시대의 어둠인 ‘광주’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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