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지은이 : 박노해
펴낸곳 : 느린걸음
2019. 6. 18. 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책씻이했다. 「고모님의 치부책」(500 - 503쪽) 전문을 올렸다. 두터운 시집에서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시편이었다. 가난으로 가족이 뿔뿔이 헤어진 어린 시인을 살붙이처럼 감싸고, 수배중의 시인이 행여 밤중에 찾아올까 대문을 열어놓고 풀 먹인 이불을 깔아놓은 조그만 몸피의 고모. 무덤에 누운 고모를 시인은 뒤늦게 찾아갔고, 고모님의 치부책에 적힌 이웃에 진 품을 갚아 드렸다.
박노해(朴勞解, 1957- )는 시인・노동운동가・혁명가다. 1980년대 ‘얼굴 없는 시인’은 노동문학의 상징이었다. 그의 27세 ,『노동의 새벽』(1984)은 전두환 정권의 발악적 금서 조치에도 100만부를 찍어냈다.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1991년 체포・고문・구금되어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 시절, 사회주의는 인간해방의 지름길이었다. 사노맹 노선을 대변하는 『노동해방문학』을 통해 시인의 글을 읽었다. 1998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후 생명・평화・나눔을 기치로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했다. 2003년부터 전 세계 분쟁 지역과 가난의 현장을 발로 찾아다니며 시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시인이 출옥한 후 12년 만에 펴낸 신작 시집(느린걸음, 2010)은 304편이 실렸다. 시편들은 전 지구적 기후 위기,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신자유주의 체제, 지구 곳곳에서 하루로 그칠 날 없는 지역 분쟁, 시장만능과 성장제일주의가 내면화된 영혼을 안타까워했다. 표제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마지막 시편이었다. 뒤표지에 실린 「그대 심장을 찌르는 詩」의 전문이다.
좋은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 / 거짓 희망이 몰아치는 시대 // 박노해의 시를 읽고 아프다면 / 그대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학창시절과 공장노동자 시절, 월간지 『노동해방문학』과 시인의 시집・글모음집이 빠짐없이 나의 손에 들렸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서해의 작은 외딴섬에 삶터를 꾸리고 책장을 정리했다. 시인의 책이 단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도서출판 《느린걸음》에서 시인의 책들을 펴내고 있었다. 나는 그중 세 권의 시집을 손에 넣었다. 『노동의 새벽』,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너의 하늘을 보아』.
두 번째 잡은 시집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의 기억은 1990년대 초반으로 빠르게 되돌아갔다. 후배 두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서울구치소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사노맹〉 사건이었다. 그때 나는 공장에서 쫓겨난 일용직 건설노동자(노가다)였다. 서울 변두리 지하방 생활자로 일을 공친 날 후배들 면회를 갔다. 영치금과 책값을 마련하기도 헉헉거렸던 젊은 날의 한때였다. 어느 햇살 좋은 봄날이었다. 의왕시 포일동의 서울구치소 면회에서 사노맹구속자 가족들을 만났다. 이정노 중앙위원의 어머니와 박노해 시인의 부인이셨다. 가족들은 주눅 들지 않고 의연했다. 그 구속자에 그 가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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