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지금 장미를 따라
지은이 : 문정희
펴낸곳 : 민음사
나의 詩에 대한 편식이 이토록 지독한 줄 새삼 알았다. 책장에 삼백 여권의 시집이 자리 잡았지만 여성 시인들의 시집은 오십 여 권이 채 되지 않았다. 그것도 맛보기로 즉흥적으로 손에 넣었던 시집들이었다.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은 네다섯 권씩 어깨를 겨누었지만 모두 남자 시인뿐이다. 두 권 이상의 시인은 손세실리아, 김민정, 조용미 단 세 사람이었다. 대중철학자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 호출된 「유방」을 읽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시인은 한국 여성시의 역사이며 한국시의 역사였다. 여성주의와 생명의식, 실존적 자아의식과 독창적 표현으로 한국 시사의 주요한 위치를 점한 문제적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시인은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정식 등단했다. 진명여고 3학년 때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시집 『꽃숨』을 냈다. 즉 시인은 ‘천재 문학소녀’였다.
내가 잡은 시선집은 『지금 장미를 따라』(뿔, 2005)의 개정증보판으로 2016. 5. 1판1쇄였다. 첫 시집 『문정희 시집』(1973)에서 열다섯 번째 시집 『응』(2014)까지 176편의 시를 시인이 엄선했다. 자신을 곡진한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婢에 비유한, 시인의 시론詩論이라 할 수 있는 산문 「나의 시 나의 몸」과 문학평론가 이숭원의 해설 「독창적 연금술의 세 가지 층위」가 실린 양장본의 시선집은 320여 쪽의 제법 두꺼운 부피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을 못 알아본 나의 시적 안목이 부끄러웠다. 시인이 직접 선選한 시선집을 군립도서관 검색창에 입력했다. 시선집이 출간된 지 10여 년이 지나서 나는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철학자가 호출한 또다른 시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도 발군이었다. 시선집에 실린 시편에서 나의 눈은 페미니즘 시에 오래 머물렀다. 표제시 「지금 장미를 따라」는 멕시코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의 집을 찾았을 때 떠오른 영감을 풀어낸 시였다. 마지막은 시인을 알게 해 준 「유방」(144-145쪽)의 전문이다.
윗옷 모두 벗기운 채 /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 패잔병처럼 두 팔 들고 /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겊 속에 / 꼭꼭 싸매 놓은 유방 /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 깊이 숨겨 왔던 유방 /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 주셨듯이 /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 오랫동안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 축 늘어진 유방을 촬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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