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대빈창 2023. 2. 17. 07:30

 

책이름 :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지은이 : 나희덕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나는 그동안 시인의 현대시 강의 『한 접시의 시』(창비, 2012), 예술 작품을 대상으로 한 산문집 『예술의 주름들』(마음산책, 2021)을 잡았다. 처음 잡은 시집은 등단 25년 만의 일곱 번째 시집이었다. 시인은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왔다. 스물 셋의 어린 시인은 ‘식물성 시인’으로 불리었다. 등단 이후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생명이 깃든 삶의 표정과 감각의 깊이를 정갈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의 시는 모성과 생명을 대지와 나무의 에로스적 관능과 촉각적 이미지로 노래했다.

시집은 4부에 나뉘어 55편이 실렸고, 해설은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의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말」 이었다. 출간된 지 10년이 가까워오는 시집은 어디선가 보았던 밀려오는 파도의 흰 물거품을 백마白馬 무리로 형상화한 이미지가 오래도록 남았다. 1966년생 말띠 시인은 2014년 말의 해에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냈다. 표제시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18-19쪽)의 전문이다.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 말의 눈동자, /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 이 비좁은 몸으로는 //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그 이미지는 10여 년을 나의 뇌리 한 구석에 살아있다, 어느날 불현듯 떠올랐다. 마침 새로 문을 연 도서관에 시집이 있었다. 인연이었다. 1부의 시편들은 그동안 근원회귀의 상상력이었던 식물 이미지가 사라짐을 꿈꾸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2부는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읊은 상당수 시편들이 눈에 띄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남동생 「그날 아침」・「불투명한 유리벽」・「피부의 깊이」, 故 김태정 시인 「식물적인 죽음」・「겨우 존재하는 」 등.

3부의 시편들에 2012년 안식년을 맞아 영국 런던대 교수로 머물렀던 흔적들이 보였다. 하나 남은 담요를 개를 감싸주는 여자 노숙자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 청바지 봉제 노동자 「명랑한 파랑」, 런던 시가의 야생 여우 「여우와 함께 살기」, 아일랜드의 점치는 방식 「진흙의 사람」, 밤늦은 패스트푸드점의 동성애자 「밤 열한 시의 치킨샐러드」, 그리고 팔레스타인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 「삼 분과 삼 분의 일」과 이 땅 해고노동자의 고공 농성을 그린 「아홉번째 파도」까지.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경의 깊이  (0) 2023.02.21
지리의 힘 2  (0) 2023.02.20
묵자가 필요한 시간  (0) 2023.02.16
동백꽃 지다  (0) 2023.02.15
지도 위의 붉은 선  (0) 2023.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