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풍경의 깊이
지은이 : 강요배
펴낸곳 : 돌베개
『풍경의 깊이』는 ‘제주4・3 항쟁 화가’ 강요배의 글과 그림을 엮은 첫 산문집이다. 187x246㎜ 책판형의 양장본은 화집처럼 장정이 고급스러웠다. 20대부터 60대까지 45년간 각종 전시와 지면에 쓴 글 34편이 3부에 나뉘어 실렸다. 1부 ‘나무가 되는 바람’은 제주도의 대자연 이야기 9편, 2부 ‘동백꽃 지다’는 ‘4・3항쟁’의 역사화를 그리게 된 배경과 금강산・휴전선・몽골초원 기행을 담은 11편, 3부 ‘흘러가네’는 청년기부터 지금까지의 미술에 대한 글 14편을 담았다. 현재-과거-미래를 오가는 구성이었다.
화집을 넘기듯 책장을 넘기면 현대 미술화가의 대표작 120점이 독자의 눈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내가 처음 화가를 접한 그림은 1989년 《한겨레신문》에 연재되었던 제주4・3 항쟁의 작가 현기영의 연재소설 『바람 타는 섬』과 함께 한 삽화였다. 화가는 〈제주 민중 항쟁사〉를 완성하고, 마흔한 살 되던 해인 1992년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나는 20여년 도회지 생활에 병들어 제주도로 회귀했다. 나고 자란 고향 마을은 아니었지만, 반대쪽 섬의 서쪽 바닷가 마을에 배낭 짐을 풀었다.”(76쪽)
책은 화가가 평생 그린 2,000여 점의 그림에서, 그림에 담긴 뜻을 표현한 글들에서 엄선했다. 화가의 사람・역사・자연을 대하는 뜨거운 마음, 오랜 연륜의 흔적, 예술을 향한 깊은 사유의 흔적이 묻어났다. “나의 자아는 두 가닥의 회로를 따라 교차하면서 자라난 듯하다. 자연과 우주, 사회와 역사로 향하는 두 가닥의 회로. 그 둘이 바람 속에 얽혀 있듯이, 그것들을 그림 속에 녹이고 싶다. 그것들은 자아와 사물의 끊임없는 대화요, 세계 속에서 중심을 찾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한 존재의 마음 궤적일 뿐이었다.”(80쪽)
책의 첫 머리에 화가는 썼다. “나의 자호는 노야老野, 늙은 들판이다.” 2011년作 〈노야老野〉는 대작으로 제주도 중산간의 화산토와 늦가을 어스름 녘에 반짝이는 물매화를 비롯한 야생화 군락을 그린 풍경화였다. 책갈피를 넘기다, 3점의 작품 제작기 「창작과 검증」에 눈길이 머물렀다. 1990년 제도권 전시장의 한 전시회에 출품 의뢰를 받고, 작품 제작 과정의 고뇌를 담은 글이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을 그린 〈골리앗 크레인을 내려오다〉, 풀빵을 든 여성노동자를 통해 표현한 전태일의 마음 〈동심〉, 우루과이라운드 파고에 무너지는 농심 〈흙가슴〉.
그악스럽게 모진 한국 근현대사의 풍경을 담는 사진 작업을 해온 사진가 노순택과 화가와의 인터뷰 소제목은 사진가가 화가의 작업실 귀덕화사歸德畵舍에서 부딪힌, 마지막 붓질만 남은 작품이 「바람에 부서지는 뼈들의 파도」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문학평론가 정지창은 발문 「시간 속을 부는 바람」에서 ‘강요배의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람이다. 그의 그림에서 나는 제주의 바람을 보고, 듣고, 느낀다.’(364쪽) 그렇다. ‘강요배식 제주도 풍경화’는 ‘바람을 그리는 화가’였다. 마지막은 「바람 부는 대지에서」(32쪽)의 일부분이다.
북쪽 먼바다로부터 하늬바람이 불어보면 바다는 크게 뒤채이며 일렁이기 시작한다.
세찬 바람에 휘몰린 바다는 물 밑 바위들에 속이 긁혀 허옇게 뒤집힌다.
가파른 갯바위는 거센 물살을 가르고 베며 앞으로 나아간다.
맵찬 칼바람에 살점 깎이운 팽나무는 검은 뼈가지로 버틴다.
바람은 구름을 휩쓸어 황무지로 후려친다.
돌팍에 얽히고설킨 덩굴들은 가시발로 바람의 가슴팍을 긁고 찢으며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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