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
지은이 : 김봉렬
펴낸곳 : 플레져미디어(주)
전 세계에 남아있는 고인돌은 5만 여기 가운데 2만9,500여 기가 한반도에 현존한다. 유럽의 대서양 연안과 지중해 일부, 인도, 동남아 일부,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한반도 전역, 중국 랴오닝성 일부, 일본 규슈지역이다. 유리왕 서기 3년에 천도한 국내성은 20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는 427년까지 425년간 수도였다. 밑변 한 변의 길이가 31.6m, 높이가 12.4m, 규모로 모두 7단을 쌓았다. 무덤의 표면은 잘 다듬은 사각형의 큰 돌을 쌓아 마감했다.
가야는 금관가야를 비롯해 낙동강 유역 10여 개의 작은 나라가 연합한 연맹국가로 뛰어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500년간 존속했다. 집 모양 토기는 영원한 안식처로 무덤에 껴묻었다. 공주, 부여와 함께 익산백제유적 지구는 2015년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왕궁리 유적은 남북 490m, 동서 245m의 백제의 왕궁터였다. 미륵사지는 중심사역 8,000평, 전체 보존지역 400만평의 거대한 절터는 동아시아 최대로 추정되었다.
경주 황룡사지는 동서 288m, 남북 281m, 2만5,000여 평의 진흥왕이 시작해 선덕여왕까지 90여 년 동안 건설한 신라 최대의 국가적 사찰이었다. 황룡사9층탑은 80여m로 현재의 아파트 27층 높이의 우리 역사상 존재했던 가장 높은 목조건물이었다. 8세기 창건 당시 구례 화엄사의 장육전 내부에 화엄경을 새겨 넣은 거대한 석경벽은 600여 매의 돌판에 총 55만여 자를 새긴 대규모 경판이었다. 이른바 장육전은 건축으로 쓴 화엄경이었고, 화엄종의 종찰이 되는 종교적 근거였다.
파주 혜음원惠陰院은 고려 시대의 큰 절, 여행객들이 숙박했던 역원, 국왕 행차시 머물렀던 행궁의 복합시설이었다. 크고 작은 높고 낮은 석단들로 조합되었고, 곳곳의 연못과 배수로, 계단과 작은 다리들이 치밀하게 짜였다. 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 중기 1200년대 초로 추정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고, 국보 제18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120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현재 공주 마곡사 가람은 태극 문양처럼 휘돌아 흐르는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의 영산전․북쪽의 대광보전 구역, 두 곳에 조성되었다. 건축적 창의성으로 지형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2개의 가람을 하나로 통합해 입체적 경축경관을 얻었다. 궁정 건축가 박자청(1357-1423년)은 지방 하인 신분으로 종1품 공조판서까지 오른 조선 역사상 불세출의 건축가였다. 한양도성, 창덕궁, 경회루, 연경사, 성균관 등 조선의 근간인 도시건설과 공공건축은 모두 박자청의 손을 거쳤다.
남원 광한루원은 남쪽 원림 속의 객사에 딸린 공용누각으로 1419년에 지어졌다. 건물은 20칸의 본루, 2칸 온돌방을 가진 익루, 3칸 계단실의 월랑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살림집의 전통을 간직한 호방하고 웅장한 안동 임청각은 고성 이씨 가문의 한 분파가 안동 법흥동에 건립한 파종택으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1858-1932년)의 생가였다.
충재 권벌(1478-1548년)이 42세에 파직당해 낙향해 터를 잡은 곳이 봉화 닭실마을이다. 청암정은 큰 거북모양의 바위 위에 얹은 10칸의 丁자형 건물, 충재는 3칸 온돌과 1칸 마루의 “비어있는 집” 이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1501-1570년) 서거 후 1576년 제자들은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을 지었다. 서애 유성룡(1542-1607년)이 죽고, 1614년 제자들은 병산서원을 창건했다. 병산서원은 서원 건축의 백미이자 현대 건축가들이 최고의 한국 전통 건축으로 뽑는 명작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축조한 울산 서생포왜성은 한반도에 현존하는 30여 왜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비교적 원형이 온전하게 남았다. 동쪽 저지대의 외성과 서쪽 133m 높이 정상의 내성으로 이루어졌다. 성곽의 총길이는 2.5㎞, 내부면적은 4만6,000평에 달했다. 인조는 병자호란 때 광주 남한산성으로 수도를 옮겨 45일간 성을 지켰다. 조선군 1만3,000여명으로 수십만의 최정예 만주군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산성의 견고함 때문이었다. 성곽은 총길이가 1만 2,335m, 면적 220만9,270㎡에 달하는 국내 최대산성이자 평균고도 450m의 고지에 떠있는 천혜의 요새다.
조선중기 문신․성리학자 곡운 김수증(1624-1701년)은 화음동 계곡 인문석人文石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짓고 정원을 만들어 ‘화음동정사’라 불렀고, 인근 사내천에 곡운구곡을 경영했다. 정중기(1685-1757년)는 참혹한 전염병(두창)과 지저분한 세속(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계)을 피해 첩첩산중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영천 매산고택은 건물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막힌 口자집’으로 높은 축대 위에 누마루 사랑채와 2층 안채를 세웠다.
삼수공 유이주(1726-1797년)가 창건한 구례 운조루는 전성기에 100여 칸에 달했다. 운조루는 명당 금가락지 형상의 오미동 정점에 위치했다. 1800년초 작품으로 추정되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는 초창기 운조루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창덕궁 후원 애련지 안쪽 깊은 곳의 기와집이었던 연경당은 원래 효명세자가 1828년에 창건한 연향용 건물이었다. 문예부흥을 주도한 효명세자는 21세 나이에 요절했고, 조선왕조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성공회는 토착 건축과 전통문화를 존중했다. 선교 초기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지어졌던 ‘한옥교회’의 대표적 건축물이 강화읍의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영국 성공회는 강화도에 11개의 교회를 더 지었는데 모두 한옥교회였다. 1897년 한국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 철도는 노량진과 인천 구간이었다. 이듬해 서대문역까지 연장되면서 남대문 간이역을 세웠는데, 바로 경성역의 전신이다, 경성역사(현대의 구 서울역사)는 1925년에 완공되었고, 현재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26년 일제는 광주나병원을 여수 율촌 바닷가로 이전명령을 내렸다. 800여명의 나환자와 가족은 기차도 타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밤길을 140㎞을 걸어 이동했다. 여수 애양원은 한센인들이 자체 인력과 기술로 병원과 교회를 비롯한 110동의 건물을 완성한 공동체 건축이었다. 제주 알뜨르 비행장은 1937년 일제가 중국의 수도 난징을 폭격하는 징검다리 기지로 제주 서귀포 대정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세운 비행기 격납고였다. 제주도내 총 360개의 오름 중 160여 개에 지하진지를 구축했다. 제주도민 5,000여명을 매일 같이 강제 동원했다.
1966년 김현옥 서울시장은 무자비한 광로3호선 도로 정비로 도심에 폭 50m, 길이 893m, 넓이 4만4,650㎡의 거대한 땅을 개발해 건축가에게 맡겼다. 김수근(1931-1986년)의 첨단건축 계획이 민간건설사들의 쪼개기 시공으로 불구로 태어난 것이 서울 세운상가였다. 건축가 이희태(1925-1981년)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일어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한강 양화대교 북쪽 한 봉우리의 서울 절두산 성당의 건축물들은 전통적 건축 문법을 근대적 방법으로 재구성한 명작이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이라크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1950-2016년)의 주목받는 대표작이다. 건축의 노벨상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건축가는 독창적인 형태와 파격적인 공간으로 새로운 도시경관을 만들었다. 경북 군위 부계는 보현산과 팔공산 등 낙동정맥 험산준령들이 둘러싼 첩첩산골이다. 건축가 승효상(1952- )은 이곳의 개인수목원 사업을 성찰과 영성을 사유하는 장소 '군위 사유원’으로 건축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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