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 서울편 4 : 강북과 강남

대빈창 2023. 4. 13. 07:00

 

책이름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 서울편14 : 강북과 강남

지은이 : 유홍준

펴낸곳 : 창비

 

미술사학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이 세 번이나 흘러갔다. 올해는 첫 권이 출간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저자는 말했다. “현재는 15권을 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토박물관 순례’ 개념으로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을 시작으로 그간 쓰지 않은 곳을 돌아 독도에서 마지막 이야기를 끝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세 권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기다리는 설레임이 남았다는 뜻이다.

서울편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4권의 부제는 ‘강북과 강남 - 한양도성 밖 역사의 체취’였다. 책은 성북동 / 선정릉 / 봉은사 /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 망우리별곡의 8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책을 펴내며」의 제목은 ‘한양도성 밖의 넓이와 깊이’ 였다. 서울은 넓다. 평수로 약 2억평(605㎢, 제주도는 약 6억평)이나 된다. 조선왕조에 이어 근현대에도 수도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 것은 한양도성 밖에 넓은 들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랬다. 수도 600년의 서울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넓고 깊어졌다.

한양도성 밖 북쪽 성곽과 맞붙어있는 성북동은 외국 대사관저와 높은 축대의 대저택이 들어선 부촌, 문화예술인들의 문인촌,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일군 달동네 북정마을로 이루어졌다. 성북동에 있던 많은 별장․별서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서울 성북동 별서’(명승 제118호)는 약 4,360평의 규모로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 잡았다. ‘푸른빛이 비치는 연못’ 영벽지影碧池를 핵심공간으로 모든 건축물이 들어섰다.

1930년대 조용한 전원 분위기에 끌려 문인묵객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33년에 만해 한용운과 빙허 이태준이 먼저 자리 잡았다. 표지사진은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壽硯山房으로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방’이라는 의미였다. 답사객의 발걸음은 인곡仁谷 배정국裵正國의 승설암勝雪庵,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67)의 노시산방老柿山房․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74)의 수향산방樹鄕山房,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제1호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84)의 옛집,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심우장尋牛莊에 머물렀다.

2009년 남한의 조선왕릉 40기 모두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사적 제199호 선정릉宣靖陵은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의 선릉宣陵과 11대 중종의 정릉靖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현재 선정릉의 면적은 2만2,800평이며 둘레가 2㎞에 달하는 부채꼴 모양의 능침으로 주변은 솔밭과 숲으로 이루어졌다. 봉은사奉恩寺는 명종5년(1550) 문정왕후(중종의 왕비)가 어린 명종을 대리청정할 때 보우(1509-65)스님을 앞세워 조선불교를 중흥하면서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다. 병들고 쇠약한 추사가 봉은사에 머물면서 죽기 3일전에 쓴 〈판전版殿〉의 낙관은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으로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라는 뜻이다.

구립區立박물관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은 강서구 가양동에 있다. 화성畵聖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과 의성醫聖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7-1615)을 기리는 기념관이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총 25권에서 2권의 목차로 자세히 분류하여 백과사전의 색인구실을 했다. 구암은 참고자료의 인용처를 일일이 밝힘으로써 근거를 명확히 했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일제강점기 1933년에 시작되어 1973년까지 40년간 조성된 것이다. 1930년대 서울 인구가 급속히 팽창하면서 일제가 주택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서울 근교의 공동묘지들을 멀리 이장시키기 위해 마련한 공동묘지였다. 40년 동안 47,700여기의 묘지가 들어서면서 묘역은 가득찼고, 1973년의 폐장으로 매장이 종료되었다. 이후 신규 분묘조성이 금지되었고, 이장과 폐묘만 허용되면서 현재 약 7,000여기의 무덤이 남아있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이제 망우역사문화공원이라는 자연 복지 공간으로 바뀌었다. 미술사학자가 제자와 함께 한 근현대 역사문화 인물들의 넋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4시간의 강행군이었다.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설산 장덕수․난석 박은혜, 죽산 조봉암, 만해 한용운, 호암 문일평, 위창 오세창, 소파 방정환,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 도산 안창호․의사 유상규, 화가 이인성, 조각가 권진규, 송촌 지석영, 삼학병의 묘.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답사객의 발길을 쫓다가 여기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 利泰院墓地 無緣墳墓 合葬碑’ 1935년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던 무연고묘 2만8천기를 화장하여 합장하고 작은 위령비를 세웠다. 뒷면은 ‘소화11년(1936) 12월 경성부 昭和十一年 十二月 京城府’.이 합동묘에 유관순(柳寬順, 1902-20) 열사의 넋이 잠들어 있었다.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고문후유증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은 시신을 인수해 정동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고 14일 이태원 묘지에 안장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들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처한 서글픈 현실에 가슴가득 슬픔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