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 서울편 3 : 사대문 안동네
지은이 : 유홍준
펴낸곳 : 창비
‘남도답사 1번지’라는 부제를 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이 세상의 빛을 본 지가 어언 30년이 되었다. 제목 글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 후기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언간독諺簡牘』에서 집자한 것이다. 나의 책장 한 칸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만으로 가득했다. 국내편 10권, 일본편 4권 그리고 한국 산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특별기념판인 ‘산사 순례’까지. 이제 내 방은 더 이상 책을 넣을 공간이 없다. 책을 향한 나의 발걸음은 배를 타고 나가 읍내 군립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서 대여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실크로드편 세권에 이어 서울편 3․4권으로 이어졌다. 서울편 1․2의 부제는 각각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와 ‘유주학선 무주학불’이다. 서울편 3의 부제는 ‘사대문 안동네 - 내 고향 서울 이야기’였다. 북악산 / 서촌 / 인왕산 / 북촌 / 인사동 / 북한산의 문화유산을 답사했다. 「책을 펴내며」의 제목은 ‘나의 체험적 서울 답사기’이었다. 미술사학자는 말했다. “제가 살아온 서울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 변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누군인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나의 이야기가 한 시대의 삶을 이야기하는 증언이 될 수 있으니까요.”
북악산北岳山은 높이 342m의 화강암 골산으로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리며 전체 면적은 360만㎢(약 110만평)이다. 북악산 서쪽으로는 인왕산(仁王山, 338m), 동쪽으로는 낙산(駱山, 125m), 남쪽으로는 남산(南山, 262m)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이들이 내사산(內四山)으로 서울은 아늑한 분지를 이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윤석열 정부의 청와대 개방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국제적 건축설계 경기로 건축가에게 마스터플랜의 책임을 맡기는 것‘이라고.
서촌은 인왕산 아랫동네를 부르는 이름이다. 북촌의 가회동 한옥마을이 뜨자, 여기도 한옥마을이 있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부르기 시작했다. 지난 1990. 7. 17. 천연기념물 제4호 통의동 백송나무가 태풍에 쓰러져 생명을 다했다. 나이테를 조사하니 수령 300년으로 1690년경에 심었다. 신기하게 1910-1945년의 일제강점기동안 백송은 성장을 멈추었다.
인왕산 옥류동 주변은 풍광이 수려해 여러 문인들이 살았다.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는 자기가 살던 〈인곡정사仁谷精舍)를 그린 그림이다. 서울 북촌에서 바라본 인왕산 전경의 표지그림을 보고 나는 겸재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즉각 떠올렸다.
북촌은 전통한옥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북촌의 한옥은 조선시대 양반가 한옥이 아니다. 1930년대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부족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규모의 개량한옥이 빽빽하게 들어찬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통의동 백송이 죽고, 이제 서울에는 두 그루의 천연기념물 백송이 남았다. 조계사 백송과 헌법재판소 건물 북쪽에 있는 ‘재동 백송(천연기념물 제8호)’은 수령이 600년으로 우리나라의 백송 중 가장 나이가 많다.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는 인사동仁寺洞이다. 1960년대의 고서점․헌책방의 거리에서 1970-80년대는 고미술상․화랑의 거리 그리고 1990년대는 전통문화 관광의 거리로 변화해왔다. 3개의 장을 차지하는 인사동의 골목과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통문관通文館의 산기山氣 이겸로(李謙魯, 1909-2006) 선생의 이야기가 가장 가슴에 닿았다. 선생은 2000. 8. 남북이산가족상봉 때 신문을 보고 일행이 방문한다는 롯데월드 민속관에서 기다렸다. 1946년 월북한 국어학자 류열 박사는 딸을 만나기 위해 남한에 왔다. 선생은 류열 박사를 발견하고 냅다 달려가 농가월령가 2부와 50만원이 든 흰 봉투를 불쑥 건넸다.
“내가 통문관이오. 선생의 책을 냈지만 기별이 끊겨 책도 못 드리고 원고료도 못 드렸수. 옛수. 받아주슈.”
북한산北漢山은 서울의 진산鎭山으로 조산祖山이다. 최고봉 백운대白雲臺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仁壽峯, 남쪽에 만경대萬景臺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불려왔다. 최고봉 높이는 836.5m, 면저은 약 30만평(77㎢)이다. 북한산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북한산순수비, 국보제3호)이다. 추사는 북한산 비봉에 두 번이나 올라 비석의 탁본을 뜨고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했다. 비석 측면에 이 사실을 고증했음을 새겨두었다. 바로 추사의 대표적인 논문이 『진흥이비고 眞興二碑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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