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지은이 : 김상준
펴낸곳 : 아카넷
나는 지은이 김상준(金相俊)을 정기구독하는 인문생태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분단체제의 극복과 시민의회에 관한 글들, 그리고 ‘비서구 민주주의’의 연재 글을 기다렸었다. 대략 두 손가락으로 꼽을 분량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이력이 믿음직스러웠다. 서울대 80학번이니, 61년생일 것이다. 학생운동가로 강제징집되었다. 92년까지 인천․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늦은 나이에 학업의 길을 나섰다.
아무래도 저자의 단행본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서적에 들어가 김. 상. 준.을 입력하고 출간순서대로 정렬했다. 책이 가장 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군립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했다. 구입할 수 없다는 변명이 가관이었다. -고가의 도서는 희망도서로 구입하고 있지 않습니다 - 나는 도서관의 구입도서 기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군립도서관은 스스로를 도서대여점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문 학술도서도 아닌 책을 얼마라는 기준을 정해놓고 그 이상이면 구입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저자의 다른 책을 대여할 수밖에. 어! 새로 문을 연 도서관 《지혜의숲》에 책이 새로 들어왔다. 내가 잡은 책은 초판3쇄로 21년 12월에 나왔다. 나는 기분 좋게 신간도서 코너의 책을 빼들었다. 967쪽 분량의 두꺼운 양장본을 덮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물론 단순한 나의 일상에 풍파가 일어 하루 반나절의 시간을 빼야겠지만. 저자에 대한 나의 기대는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는 1990년대 초반 소련․동구권의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인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난동질. 기후위기로 인한 문명전환이 요구되는 암울한 전망에 갇힌 현재. 30여 년에 걸친 세계 변화의 방향을 탐색하는 학문 여정을 1차적으로 매조지하는 ‘탐사보고서’였다. 저자는 근대 500년 역사의 대전환을 서구의 팽창문명과 동아시아 내장문명의 변증법으로 풀어냈다. 여기서 내장內張은 안內으로부터 스스로 성장張하는 것이고, 팽창膨脹은 바깥으로부터의 포식捕食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당면한 파국을 극복하여 새로운 문명을 열어갈 방법, 방향, 근거를 제시했다.
역사학계에서 말하는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는 ‘19세기에 벌어진 동서양의 우세 역전과 격차 심화’를 일컫는 용어였다. 문명화를 이끈 서구가 근대 이후를 주도했으며 이러한 ‘서구주도근대’에 대한 인식이 20세기까지 세계관의 표준이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의 부상’이 가져다 준 관점의 전환으로 대분기의 현상이 새롭게 주목받았다.
책의 구성은 근대역사를 유라시아 문명들이 비교적 동등한 상태에서 공존․교류하던 초기근대(形). 세계에 대한 일극적 서구 패권이 형성되었던 서구주도근대(流-勢1-勢2). 외형상 다시 초기 근대의 형세로 전이轉移하는 모습을 보이는 (形’) 후기근대의 5부로 나누었다. 동아시아와 서구가 충돌하면서 벌이는 힘의 상호 관계가 形-流-勢-形’라는 하나의 순환적 흐름이 교차하는 변화과정으로 풀어냈다.
인류의 역사는 내장성이 우세했던 호모 사피엔스 집단의 20만년, 팽창성이 우세했던 마지막 500년, 그리고 팽창문명이 서양의 세계지배를 통해 절정에 이르렀던 지난 200년, 끝으로 21세기 '후기 근대'에 다시 돌아오고 있는 ‘전 지구적 내장성’의 시간 20년이었다. 저자는 17-18세기 동아시아의 ‘200년 평화’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19세기 들어 ‘유럽의 10년 평화’ 시기에 동아시아는 전란에 빠져든 역逆의 시기에 주목했다. 이 시기는 외부의 포식을 바탕으로 팽창적 문명원리의 서양과 동아시아의 내장 문명이 대비되는 지점이었다.
서구의 팽창문명은 16세기 종교전쟁부터 20세기까지 500년간 싸움과 약탈의 역사였다. 유럽내전이 확대된 것이 세계 제1․2차대전으로 미소냉전으로 이어졌다. 이를 정리하면 유럽내전의 1단계는 16-17세기 종교전쟁, 2단계는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 3단계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격돌한 좌우 이데올로기 투쟁. 제국주의 전쟁(1차대전), 파시즘 전쟁(2차대전) 그리고 미소냉전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미소냉전의 본질은 팽창근대의 선발/후발의 최종대결로 유럽내전의 3단계였다.
눈길을 끄는 표지그림의 거대한 새의 날개 주인공은 『장자莊子』 「내편內篇」에 나오는 새 붕鵬이었다. 붕은 날개짓 한번으로 일으킨 풍파가 3천리에 이르고, 한번 날면 북명北冥에서 남명南冥까지 내리 6개월을 날았다. 저자에게 붕새는 시베리아 최한극과 태평양 최열극을 매년 주기적으로 오가는 ‘동아시아 몬순지역 계절풍’ 이었다. 붕새는 동아시아의 기후와 문명의 규칙성과 장기지속성, 그리고 생명력을 상징했다. 책을 덮고 나자, 동아시아는 장자의 붕새가 나는 공간이었다. 또한 붕새의 날개짓은 동아시아 내장문명의 재도약을 상징했다. 동아시아 내장근대와 서양 팽창근대를 두 날개로 삼아 변증법적 지구 비행을 하는 거대한 새 붕새는, 인류 문명의 팽창성과 내장성을 두 날개로 하여 호모 사피엔스의 20만년의 역사를 날아온 ‘인류의 새’였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은 노래 (0) | 2023.04.26 |
---|---|
정확한 사랑의 실험 (0) | 2023.04.25 |
26세를 위한 여섯 개의 묵시 (0) | 2023.04.21 |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 (0) | 2023.04.20 |
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 (0) | 2023.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