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해가 돌아오면 이철수 판화달력이나 신영복 선생 붓글씨달력을 걸었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과 2023년 계묘년癸卯年은 연속 붓글씨달력이었다. 올해도 여지없이 달월을 가리키는 숫자 옆에 《禁酒》를 붙였다. 의지박약자의 자기다짐이었다.
1月의 큰 글씨는 ‘처음처럼’이었다. -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서울 볕내 남골 쇠귀 - 글씨 한 귀퉁이의 그림은 이제 막 솟아난 새싹 위로 어린 새가 날고 있었다.
내가 이 글귀를 처음 만난 책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햇빛출판사, 1998)이었다. 선생의 글씨체를 ‘연대체連帶體’ 또는 ‘어깨동무체’라고 부른다. 서민의 술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의 글씨체였다. 획의 굵기와 리듬에 변화가 많은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은 독특한 서체였다. 선생은 어머니의 모필 서간체 글씨에서 착안해 서체를 새로 개발했다.
2月의 큰 글씨는 ‘山水大友’였다. - 山은 江을 보내고 江은 山을 부른다. 牛耳 - 글씨체는 전서篆書였다. 한자 서예 오체五體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를 이른다. 전서篆書는 고대 서체의 하나로 한위漢魏 이전에 쓰였던 글자체였다. 한자漢字의 고대문자 즉 갑골문자를 토대로 한 글자다. 한자는 상형문자로 글씨 자체가 이미 조형적인 요소를 품고 있어, 일찍이 한자문화권에서는 글씨가 예술적 감상의 대상이었다.
나는 전서篆書하면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삼척부사 시절인 1661년(현종 2)에 쓴 삼척 척주동해비三陟 陟州東海碑가 떠올랐다. 미수眉叟의 기묘한 서체는 바닷물로 인해 피해가 극심한 주민을 위해 동해의 조수를 물리치기 위해 비를 세웠다고 한다.
새해를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달력 한 장을 넘겼다. 계묘년癸卯年은 시작부터 고통과 슬픔이 들이닥쳤다. 큰형이 69세의 이른 나이로 소천召天 하셨다. 어릴 적 낮은 언덕 위아래 이웃에 살던 동무가 큰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 지난 번 면회는 얼굴도 못 보고 돌아섰다. 주말 다시 병문안을 가야겠다. 앞으로 열한달, 나의 앞길에 어떤 운명이 놓여있을까. 올해도 나는 작년처럼 단순소박한 삶을 살며 책읽기로 소일할 것이다.
'대빈창을 아시는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뒷집 새끼 고양이 - 37 (0) | 2023.02.22 |
---|---|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 3 (0) | 2023.02.07 |
강화도서관 (0) | 2023.01.31 |
큰형의 죽음 - 2 (0) | 2023.01.10 |
큰형의 죽음 - 1 (0) | 2023.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