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 3

대빈창 2023. 2. 7. 06:00

 

내가 사는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는 밤낮을 가리지않고 고라니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그때마다 두 귀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뼛속마저 울리는 극한의 고통스런 울음은 듣는 이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다. 녀석은 목을 파고드는 올가미나 발목을 조여드는 덫에 피를 흘리며 순한 눈동자에 가득 눈물을 머금었을 것이다. 나는 니빠로 철사를 끊거나 빠루로 덫의 아가리를 벌리는 공상에 빠져들었다.

모르는 이의 근심과 걱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환경운동하는 작가’ 최성각의 산문집 『산들바람 산들 분다』(오월의봄, 2021)를 읽고 나의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고라니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은 죽음을 앞둔 단말마의 비명이 아니었다. 암컷에게 알리는 번식기의 수컷 울음소리였다. 어째 순하디순한 눈망울의 녀석이 지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울음으로 암컷에게 자신의 사정을 알리는 것일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동물의 세계였다.

위 이미지는 저녁산책에서 인기척에 뜀박질로 도망가다 뒤돌아선 고라니의 모습이다.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1․2」 앞글에서 밝혔듯이 녀석은 도망가다 영락없이 한번은 뒤돌아선다. 고라니의 절묘한 보호색은 ‘숨은 그림 찾기’가 되었다. 나의 산책은 봉구산자락 옛길을 따라가다 다랑구지 들녘 가장자리 농로를 타고, 대빈창 해변에 이르러 제방길을 따라가다 바위벼랑에서 돌아오는 코스로 대략 한 시간 거리였다. 섬은 특히 바다바람이 거셌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산책코스로 다른 길을 택했다. 바다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책 라인의 빗살무늬토기 바닥에 해당하는 부분은 신갈나무가 작은 숲을 이룬 삼거리다. 여기서 평소에는 해변으로 향하는 오른쪽 농로를 타지만 바람이 세찬 날은 호두과원을 끼고 봉구산으로 숨어들었다. 왼쪽 오솔길로 접어들어 봉구산 옆구리를 질러가는 산길을 타면 바위벼랑위 나무테크 대빈창전망대 뒤편의 고마이 묵정논에 닿았다. 바다에 이른 막다른 길을 되돌아오면 이또한 한시간 거리였다. 거친 바람도 울창한 숲에 막혀 숲속은 적막 그 자체였다.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귀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 산책도 산길로 잡아야겠다. 그때 삼거리에서 해변으로 향하는 길에 서너 마리의 기러기가 몇 발자국 앞에서 뒤뚱거렸다. 배가 고픈지 놈들은 인기척도 못느끼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서 어슬렁거렸다. 녀석들은 마른 고춧대에 내버려둔 고추를 깡그리 먹어치웠다. 그때 후다닥 어미수컷으로 보이는 고라니 한 마리가 나를 발견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녀석은 늙어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유달리 궁금증이 많은 놈인지 모르겠다. 15여 미터를 도망갔을까. 뒤돌아 멀건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겁 많은 짐승의 대명사 고라니가 가까운 거리에서 나와 마주보고 있었다. 싸라기눈이 막 내리기 시작했고, 하늘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자신의 발정을 알리는 울음으로 한때 나를 괴롭혔던 녀석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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