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카에게 봉투를 건네며 친척 어르신들이 찾아왔을 때 지킬 예를 몇 가지 일러주고 물었습니다.
“남긴 말씀이라도 있으셨느냐”
“아버님은 가족 형제끼리 화목하게 지내라고”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하느님은 나를 너무 빨리 데려가시는구나.”
큰형은 삶에 크게 애착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에 비해 큰 형의 69세는 때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사실 큰형과 나의 우애는 아버지 죽음을 계기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는지 모르겠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섬에 모시면서 나는 큰형네로 향하는 발길을 끊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하루를 묵고 섬에 들어온 나는 이틀을 자고 발인날 아침, 첫배에 올랐습니다. 작은형은 새벽같이 인천집을 나서 장례식장 발인을 지켰고, 운구 행렬의 영정을 들었습니다. 김포성당 미사 집전을 마친 운구행렬이 예상보다 빨리 승화원에 도착했습니다. 승화원은 말그대로 인산인해였습니다. 고인을 마지막으로 보내고, 2층 한식당에서 급히 점심을 때웠습니다. 서둘러 나는 섬으로 향했습니다. 지난 연말 크게 앓으신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더욱 의지하셨습니다. 막배를 놓치면 외박을 하는 불편보다 어머니의 안위가 크게 염려되었습니다. 나의 활동 폭은 해가 갈수록 줄어 들었습니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에 오르자, 큰형을 봉안당에 모신 사진이 조카에게서 날아왔습니다. 고인은 강화도 갑곶순교성지에 모셨습니다. 조카가 기특했습니다. 큰 형의 자리번호는 【2가-4-28】 이었습니다. 산분장散粉葬이 예정되었다면 나는 큰형의 유골을 우리집 텃밭 수목장으로 모실 생각이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못 먹어서 그래”
김포에 살던 시절, 진득하게 자리를 못 잡고 방황하던 키가 작았던 큰 형이 집에 들렀다 돌아가면 어머니는 측은해하셨습니다. 54년생 큰 형은 내가 말로만 듣던 보릿고개를 겪으셨던 세대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밀기울이나 허연 보리죽으로 연명했다고 합니다. 자칭 진보주의자였던 나는 천민자본주의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던 큰 형의 고달픈 삶을 안아주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시간 내서 큰 형이 영면한 강화대교 옆 갑곶순교성지에 발걸음을 해야겠습니다. 고인을 일산에서 김포장례식장에 모신 다음날 새벽, 길을 나서는 나에게 조카가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삼촌, 곧 할머니 뵈러 섬에 들어 갈께요.”
그래,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가진 자에게 천국, 가난한 자에게 지옥인 각자도생의 이 땅에서 흙수저로 태어나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조카들이 애처로웠습니다. 3남1녀의 자식에서 둘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슬픔은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우리집 뒷산 봉구산이 성큼 저 멀리서 뱃전으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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