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그후, 일테면 후일담

대빈창 2011. 1. 18. 02:11

 

 

책이름 : 그후, 일테면 후일담

지은이 : 김영현

펴낸곳 : 천년의 시작

 

나는 생각한다./적당한 승리와 적당한 패배가 있었을 뿐이라고./너희 엄살떠는 무리들이나/너희 희희낙낙하는 무리들에게/역사란 완전한 승자도 완전한 패자도 없을 때/오로지 시간의 완강한 방향만이/지속적인 생을 보장할 때에만/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고/거대한 강은 상처투성이의 모순을 안은 채/용서하며, 사랑하며 흐르는 법이라고```/나는 생각한다./수많은 죽음 위에/ 그리고 그보다 더 많았을 추억들 위에/절대로 제단할 수 없는 神만의 자리가 있고,/나는 절대로 어제의 나일 수가 없고,/변화야말로 모든 생명 있는 것/혹은 생명없는 것들의 본질이며/사랑에도 이끼가 끼고 녹이 슬게 마련이라는 것을/이 적당한 승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 만큼/이 적당한 패배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그리하여/이 자유와 슬픔이 또한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란 걸/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도저히 흐르는 강의 어쩔 수 없는 힘을 알기 때문에

이 시집의 표제작인 '그후, 일테면 후일담'의 전문이다. '후일담'이란 용어는 90년대 내내 문학판의 화두였다. 90년대 소설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작가는 단연 공지영이었다. 그의 작품은 80년대 격동의 시기를 방관자로서가 아닌, 역사를 온 몸으로 밀고 나간 경험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그런데 평론가 김윤식이 최초로 그의 소설들에 '후일담 문학'이라 이름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젊은 평론가 이명원은 '후일담 문학'이란 용어를 폐기하자고 주장했다. '시장권력과 인문정신'에서 문학비평계의 태두 김윤식의 '표절'을 비판한 이명원의 논문을 소개했는데, 어째 오늘 글에서도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후일담'이라는 용어가 '과거부정'의 뉘앙스를 풍긴다는데 있다. 80년대 진보적 문인계열의 '관념적 급진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한 것이지, 민중의 혁명성이 폭팔하던 그 시절 팔짱만 끼고 있던 세력들이 열기가 한풀 가시자, 문학의 진보적 실천행위들을 냉소적으로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긴 평론가 김윤식은 저자의 소설 '벌레'를 언급하면서 인간이 '이데올로기적 존재'가 아닌' 벌레와도 같은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을 이루었다고 경탄했다. 소비에트 공화국과 동유럽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전일적 승리를 확인하는 것으로 역사의 진보는 끝장났다는 역사허무주의에 편승하는 현실추수주의적 태도다.

내가 저자를 처음 만난 것은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는 단편소설을 통해서다.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얼마나 세월의 비통함에 몸을 떨었던가. 그후 나는 저자의 모든 작품을 찾았다. 세계문화예술기행의 일환으로 학고재에서 펴낸 '서역의 달은 서쪽으로 흐른다'은 '어떤 傳說'에 언급되었고, '봄감기'에는 '나쓰메 소세키를 읽는 밤'에도 나오는 젊은 날의 고통스런 기억(고문)을 되살린다. 더군다나 소설 '포도나무집 풍경'에는 나의 고향 김포의 어느 한적한 시골의 빈집에 내려와 이 땅의' 민중투쟁사'를 집필하던 저자의 어렸웠던 젊은 한때가 투사되었다. 이 시집은 '겨울바다', '남해엽서'에 이은 저자의 세번째 시집이다. '아직 남은 분노와 열정이 도처에 남아 있다'고 서문에서 고백한 저자의 삶에 대한 허망함과 성찰이 4부에 나눠실린 58편의 시편 곳곳에 묻어난다. 그러고보니 'daebinchang'이라는 이름을 가진 블로그도 나의 삶이 걸어 간 길을 되돌아보는 '후일담'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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