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시대를 훔친 미술

대빈창 2023. 7. 14. 07:00

 

책이름 : 시대를 훔친 미술

지은이 : 이진숙

펴낸곳 : 민음사

 

출판칼럼리스트 故 최성일(1967-2011)의 책들은 나의 독서목록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내가 잡은 40여권의 서양화 미술 관련서적의 절반은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책이다. 저자 이진숙은 독문학을 전공했지만 러시아 트레차코프미술관에서 만난 작품의 감동으로, 학문의 길을 미술로 돌렸다고 한다. 부제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이 가리키듯, 그림으로 읽는 인간과 세계의 미술교양서였다.

중세, 르네상스, 종교개혁, 절대왕정, 미국 독립, 프랑스 혁명, 제국주의, 제1․2차 세계대전, 대공황······. 미술평론가는 유명한 그림들을 시대별․언어권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단순한 회화사, 화가의 연대기가 아닌 인간 역사를 중심에 두었다. 랭부르형제의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에서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까지 174장의 풍부한 도판은 독자의 눈을 맑게 했다. 아래는 저자가 28장을 가려 뽑은 연대순으로 배치한 「이 책에서 마주할 순간들」의 그림에 대한, 내가 짧게 그은 밑줄이다.

랭부르형제의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1412-1416)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초기 중세 미술에서 벗어나 세속적 취향이 반영된 미술. 베네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예배〉(1459-1461)는 피렌체 르네상스의 후원자이자 실질적 지도자였던 메디치 삼대가 등장하는 그림으로 메디치 가문의 앞날을 예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베누아의 성모〉(1478)는 자연을 호기심과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 표정. 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의 〈최후의 심판〉(1536-1541)은 교황청의 약화와 세속 군주권의 강화,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기독교 교리와 르네상스의 이교적 신화가 공존하면서 만들어 낸 대서사시.

피터르 브뤼헐의 〈세례요한의 설교〉(1566)는 16세기말 종교개혁기의 복잡한 네덜란드에서 집회에 모여 든 다양한 인간군상 . 미켈란젤로 카라바조의 〈성 바울의 회심 2〉(1601)는 바울을 통해 기독교는 유대인의 민족종교에서 보편적인 세계종교로 발전한 기틀을 마련.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의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와 판 루이턴뷔르흐 중위가 이끄는 민병대〉(1642)는 삼십년 전쟁에서 종교적인 갈등을 초월하여 조국수호라는 공통된 목표 앞에 단결한 네덜란드인. 얀 데 헤임의 〈화병〉(1669)은 꽃다발은 제 계절이 아닌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한꺼번에 묶여, 교역으로 다양한 물품들이 수입되면서 풍요로워진 삶.

앙리 테스틀랭의 〈1667년 창립된 왕립과학원 회원을 루이 14세에게 소개하는 콜베르〉(1667)는 프랑스 안의 다양한 다민족을, 프랑스 국민이라는 하나의 의식으로 묶어낸 절대왕정의 통치자 루이 14세. 모리스 캉탱 드 라투르이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1755)는 로코코 시대의 숨은 실력자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사교계의 여왕으로 살롱 문화를 주도. 이스트먼 존슨의 〈남부 흑인들의 삶〉(1858)은 백인 여자에 감시되는 흑인들의 표피적인 평화를 드러낸 화가의 노예들에 대한 연민의 정.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1793)은 1789년 프랑스의 혁명을 여론으로 이끌었던 혁명적 영웅의 죽음.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2일 맘루크군의 공격〉(1814)은 외국 왕의 통치를 거부하며 대대적인 저항을 벌이는 스페인 민중을 무참하게 짓밟는 나폴레옹 친위부대 이집트 맘루크 기병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는 자욱한 안개 바다를 응시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현실 질서에 대한 저항 정신과 이상향의 열망.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2)은 1830년 7월 프랑스 혁명에서 자유의 여신의 인도로 바리게이트를 넘어서 진군하는 민중의 힘찬 행진. 빈센트 반 고흐의 〈해 질 녘 씨 뿌리는 사람〉(1888)은 산업화 과정의 비참한 노동과 대비되는 대안적 가치의 제시.

아돌프 멘첼의 〈주물공장〉(1872-1875)은 산업화된 노동은 기계에 종속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으로 변화의 기운을 담아낸 계급의 문화적 특징. 펠리시앙 롭스의 〈창부 정치〉(1878)는 산업화에 따른 도시의 성장,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 정치적으로 여성의 동등한 권리 요구. 장레옴 제롬의 〈로마의 노예시장〉(1886)은 강하고 진보한 남성(서양)에게 여성(동양)은 길들여지고 거듭나다는 허황된 생각이 지배하던 시대.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은 세계를 지배하던 기존의 법칙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새로운 법칙에 기대는 화가의 오랜 열망.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군인 자화상〉(1915)은 예술가가 군복을 입은 채 불구가 된 모습은 예술 적대적 사회에 대한 고발. 엘 리시츠키의 〈붉은 쐐기로 백군을 강타하라〉(1919)는 1920년 붉은 군대가 반혁명세력을 완전하게 궤멸시킨 것을 그린 기하학적 추상의 아방가르드 작품. 디에고 리베라의 〈꽃 축제〉(1925)는 멕시코의 뿌리 인디오 여인들의 단순하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표현.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1930)은 아메리칸 드림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킨 대공황의 시작, 1929년 19월 25일 검은 금요일. 살바도르 달리의 〈삶은 강낭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조물: 내란의 예감〉(1936)은 파시스트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국제적인 파시즘과 반파시즘 진영의 대결로 확산된 ‘20세기 이념의 격전장’ 스페인 내전.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여권을 들고 있는 나의 초상〉(1943)은 그림 속 화가가 손에 든 신분증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네덜란드 국적의 유대인이라고 적혀있고, 유대인 식별 표시 노란별이 새겨진 낡은 외투.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1993)는 강력한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1938년 작품을, 독일이 통일을 이루고 전쟁 희생자를 위한 기념관 노이에바헤가 재개관하면서 작은 조각품을 확대 설치.

표지그림은 2008년 ‘올해의 미술인상’에 빛나는 젊은 미술인 홍경택의 〈모놀로그〉(2008)이다. 우리가 예술을,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미술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인류의 오래된 꿈을 확인하고 그 꿈을 이어 가기 위해서”(543쪽)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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