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해자네 점집
지은이 : 김해자
펴낸곳 : 걷는사람
시집 시리즈 첫째 권을 뒤늦게야 잡았다. 문학전문 출판사 〈걷는사람〉의 ‘걷는사람 시인선’이다. 『해자네 점집』은 국내 시인선 시리즈 가운데 여성 시인이 1권을 출간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동안 정기구독하는 인문생태잡지 『녹색평론』과 여러 문인은 산문에서 시인을 자주 언급했다. 이제야 시집을 펼치다니.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김해자(1961- )는 고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조립공, 시다, 미싱사, 학습지 배달, 학원 강사를 전전했다. 노동자들과 시를 쓰다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15여 년 째 농사를 짓고 있다. 『해자네 점집』은 네 번째 시집이었다. 4부에 나뉘어 61편이 실렸고, 시인 황규관은 발문 「불구가 아니라면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네」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 계열은 구체적인 삶을 파괴하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들‘(147-148쪽)이라고 평했다.
뒷표지 표사는 시인 안현미와 권민경이 글부조를 했다. 권민경은 ‘시인은 모든 아픈 사람, 이웃의 자매이다. 그녀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한 위로의 글을 쓴다.’고 했다. 아래는 시편들을 읽어 나가다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머물렀던 자리와 시인의 모습을 거칠게 메모했다.
빌린 막걸리를 갚으려고 머리맡에 놓고 저 세상으로 간 살구나무집 어매 / 말참견으로 한 몫하는 농촌 백수 / 춥다고 게발선인장을 방에 들여놓는 양씨 / 광부의 작업복을 꿰매는 옷수선집 미싱사 / 제초제를 입안에 부어버린 그 / 태아성 미나마타병자 모쿠 / 죽은 닭장집 사내의 제사를 차려주는 옆방 여자 / 한 마리만 남은 상아부리딱따구리 / 권정생 선생과 안상학 시인 / 걸어 다니는 점집을 차린 여자 / 생떼 같은 어린 것을 보낸 맥아더 장군 보살 / 조폭의 문신을 뜨는 여자 / 매번 자살에 실패하는 남자 / 현장 페인트공 여자 인부 / 삼례 나라슈퍼 삼인조 / 성주 할머니의 사드배치반대 투쟁 /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모자의 쓸쓸한 죽음 / 롤러코스트 알바의 사고사 / 80년대 군사정권 고문 피해자 / 조작된 유럽유학생간첩단사건의 사형수와 어린 딸 / 인천 배다리 헌책방 아벨서점의 곽현숙 / 함께 부둥켜안고 타죽은 여공들 / 광화문 광장에 모인 촛불 든 사람들 / 돼지농장에서 돼지똥 치우다 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네팔 노동자들
시력詩歷 20년째를 맞아 펴낸 시집은 2018년 제33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들은 “삶의 지독한 굴곡들이 만든 내면의 사건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삶들이 얽히고 섞이면서 움직이는 사회적인 생명체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마지막은 시집을 여는 첫시 「밤 속의 길」(11쪽)의 전문이다.
삶은 밤을 까다 누런 데를 도려내는데 / 허연 벌레가 툭 떨어졌습니다 / 화들짝 오므리더니 금세 꾸물꾸물 기어갑니다 / 제 몸 수십 배 높이에서 투신해서도 살다니 / 뜨거운 화탕지옥에서도 살아남았다니 / 날카로운 칼산지옥도 피해 갔다니 / 집이자 밥이었던 살 속에 / 누런 길이 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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