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묘사하는 마음

대빈창 2023. 8. 8. 07:25

 

책이름 : 묘사하는 마음

지은이 : 김혜리

펴낸곳 : 마음산책

 

“세상에는 객관적으로 잘 쓴 글들이 많지만 김혜리의 글이 내게는 주관적으로 그렇다.······. 나는 그냥 잘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처럼’ 잘 쓰고 싶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토막글을 어디선가 눈동냥했다. 군립도서관을 검색했다.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어크로스, 2017)를 빌려왔다. 〈씨네 21〉 편집위원 김혜리의 여섯 번 째 책이었다. 5년 만의 신간이었다. 군립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했다.

영화산문집 『묘사하는 마음』은 주간지 〈씨네 21〉의 개봉작 칼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에 2017-2020년에 연재되었던 글과 배우론, 몇 편의 에세이가 더해졌다. 서문에서 말했다. “언제나 영화가 있었다. 어제까지 그만 써야 할 100가지 이유를 만지작거렸던 자신을 까맣게 잊고 흥분해서 키보드 앞에 앉게 부추겼던 영화들이.”(10쪽) 책의 구성은 7부에 나뉘어 53편의 글을 담았다.

1부 ‘부치지 못한 헌사’는 5편의 배우론이었다. 연기적 풍부함은 한 캐릭터 안에 두 가지 공존하는 표현을 보여주고, 통합된 퍼스낼리티를 유지하면서 모순을 설득하는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 1953- ). 우아한 안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과시적 군더더기 없이 목표를 달성하는 정확성과 경제성의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 1976- ). 대책 없는 스턴트를 감행하는 고전 스크린 스타 중에서도 초기 영화의 위대한 슬랩스틱 배우에 근접하는 톰 크루즈(Tom Cruise, 1962- ). 호들갑 없이 꼭 필요한 연기를 꼭 필요한 만큼 완수하는 동시에 관객과의 친근감을 지속하는 폴 러드(Paul Rudd, 1969- ). 현대 영화에서 사라지다시피한 피안彼岸을 상징하는 얼굴, 우리가 소유한 적 없는 얼굴을 가진 틸다 스위튼(Tilda Swinton, 1960- ).

2․3․4부는 영화의 주제로 가름했다. 2부 ‘각성하는 영화’는 마이애미 빈민가 게이 소년 샤이론의 성장(마약, 빈곤, 범죄 등) 이야기를 다룬 배리 젠킨스 감독의 2016년작 〈문라이트Moonlight〉에서 129번국도 주변의 퇴락한 모텔 매직 캐슬에 사는 빈민가 소녀 무니와 친구들의 이야기 숀 베이커 감독의 2017년작 〈플로리다 프로젝트The Florida Project〉까지 7편. 3부 ‘욕망하는 영화’는 가정법원에 나란히 앉아 변호사들의 대리전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합의이혼 과정의 니콜과 찰리를 그린 노아 바움백 감독의 2019년작 〈결혼이야기Marriage Story〉에서 1702년 앤 여왕이 즉위한 잉글랜드 궁정의 모든 것을 다룬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2016년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The Favourite〉까지 8편. 4부‘근심하는 영화’는 자본주의 식량 생산 시스템을 비판하는 어드벤쳐 봉준호 감독의 2017년작 〈옥자〉에서 여성의 섹스어필을 상품성으로 내세우는 레스토랑의 동료들의 명예와 책임을 지켜주는 성실한 매니저 리사의 이야기 앤드루 부잘스키 감독의 2015년작 〈그녀들을 도와줘Support the Girls〉까지 8편.

5․6부는 영화의 형식에 천착했다. 5부 ‘액션과 운동’은 여성이 가축 취급되는 남성 독재체제의 22세기 부족사회로 퇴행한 디스토피아 지구촌을 그린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에서 성매매 조직에 납치된 미성년자들을 구조하는 퇴역군인 조의 이야기 린 램지 감독의 2017년작 〈너는 여기에 없었다You Were Never Really Here〉까지 5편. 6부 ‘ 시간의 조형’은 동일한 인물들이 만나 대동소이한 장소를 돌아다니는 과정이 번복되는 홍상수 감독의 2015년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두 인간과 말 한 마리가 절망을 통과해 종말에 이르는 엿새의 기록 벨터 터르 감독의 2011년작 〈토리노의 말A Torinó Ló〉까지 7편.

7부 ‘팽창하는 유니버스’는 2010년대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지형을 다루었다. 해리와 헤르미온느, 론은 볼드모트가 영생을 위해 제 영혼을 여럿으로 쪼개어 보관한 호크룩스들을 마저 찾아내 파괴하는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의 2011년작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 Part2〉에서 오리지널과 배타적으로 동일시되는 디즈니 이미지의 유효 기간을 연장시켜 준 가이 리치 감독의 2019년작 〈알라딘(실사)Aladdin's Live Action〉까지 13편.

김혜리의 단정한 사유와 섬세한 문장의 영화읽기는 영화적 서사와 형식이 맞물려 작동하는 비밀을 드러내는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글줄을 따라가다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하고 친 구절이다. “대개 배우의 얼굴은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고난 자연스러운 표정을 잃고 ‘연기’를 하는 우리가 극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의 퍼포먼스를 보는 동안만큼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연기를 멈추고 휴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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