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잃어버린 계절
지은이 : 김시종
옮긴이 : 이진경․카게모또 쓰요시
펴낸곳 : 창비
영원히 다른 이름이 된 너와 / 산자락 끝에서 좌우로 갈려 바람에 날려간 뒤 / 4월은 새벽의 봉화가 되어 솟아올랐다. / 짓밟힌 진달래 저편에서 마을이 불타고 / 바람에 흩날려 / 군경 트럭의 흙먼지가 너울거린다. / 초록 잎 아래 아로새긴 먹구슬나무 밑동 / 손을 뒤로 묶인 네가 뭉개진 얼굴로 쓰러져 있던 날도 / 흙먼지는 뿌옇게 살구꽃 사이에서 일고 있었다.
「4월이여, 먼 날이여」(86-88쪽)의 4연이다.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김시종(金時鐘, 1929- )은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로 건너갔다. 제주4․3 항쟁에 참여했고, 이듬해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오사카 재일조선인 거주지 이까이노에 정착한 뒤 줄곧 일본어로 시를 써왔다. 시인은 ‘일본식 서정’을 벗어나기 위해 끝없는 실험을 시도했고, 일본 문단에서 비주류로 오랜 세월을 이겨냈다.
『잃어버린 계절』은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이었다.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일본인 가게모토 쓰요시가 먼저 번역하고, 철학자 이진경이 우리말 리듬에 맞춰 최종 교정을 보았다. 다른 시집 『이카이노 시집』, 『화석의 여름』, 『계기음상』이 이진경과 심아정․와다 요시히로의 공동 번역으로 곧 출간된다고 한다. 이로써 기존번역 시집 『지평선』, 『경계의 시』, 『광주시편』, 『니이가타』까지 8권의 김시종 시집이 한국 독자와 만나게 되었다.
시집은 계절별(여름-가을-겨울-봄)로 8편씩 32편이 실렸다. 시인은 시집을 ‘김시종 서정시집’이라고 이름 붙이려다 민망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의 서정은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살려내고, 비극적 삶과 타인의 고통을 성찰하는 서정이었다. 공동번역자 이진경은 이 땅 현대사의 비극에 온 몸으로 맞선 재일조선인 김시종 시인을 이렇게 평評했다. “재일의 삶은 일본에 살지만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이죠. 어둠 속의 삶이죠.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힘든 삶이죠.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틈새의 삶이죠.” 마지막은 표제시 「잃어버린 계절」(24-26쪽)의 도입부다.
우리의 계절은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다. / 있는 건 마찌꼬바 무더위에 지친 카네모또 요시오 / 깡마른 목덜미를 스치고 다시 불어오는 / 업무용 선풍기의 힘찬 울림, / 혹은 직업소개소 대기실 지친 비정규직 / 이마에 미끈대는 외분비선 기름기뿐이다. / 정주(定住) 외국인인 조선인임도 이젠 확실하지 않게 된 너와 / 더없이 사근사근해진 한류 팬 중년 부인 사이에서 / 이토록 느긋하게 즐거워하는 것은 드라마의 다음 편과 / 한정식의 많은 반찬 가짓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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