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민족혼으로 살다
지은이 : 전인초․유중하․송영배․유경조․서광덕․이영구․신진호․정진배
펴낸곳 : 학고재
나의 책장에서 오래 묵은 책 중의 하나가 네 권짜리 『노신선집』이다. 여강출판사에서 1991. 6. 30. 초판 발행된 책은 책술이 낙엽처럼 누렇게 바랬다. 1권은 소설․산문시․산문․고시, 2․3권은 잡문, 4권은 잡문․서한의 대표작을 선選해서 실었다.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의 기억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광인일기」, 「아Q정전」의 작은 흔적도 없다니. 실린 글들은 족히 수백 편을 헤아릴 것이다. 납 활자로 조판된 글줄을 따라가기에도 눈이 시큰거렸다. 아무래도 〈노신〉을 다시 만나려면 큰글자 도서를 손에 넣어야겠다.
내가 잡은 『민족혼으로 살다』는 1999. 2. 27. 1쇄 발행이다. 부제 ‘루쉰 그 위대한 발자취를 찾아’서가 가리키듯 국내 중문학자들이 루쉰이 머문 발자취를 따라가는 답사가 주 내용이었다. 중국 현대문학의 태두 루쉰(魯迅, 1881-1936)은 사오싱에서, 난징 / 도쿄 / 센다이 / 샤먼․광주를 거쳐 상하이에서 멈추었다. 중국이 낳은 대문호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으로 저장성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1898년 난징(南京)으로 신학문을 배우러 떠나기 전까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고향이다. 루쉰의 본부인 주안(朱安, 1878-1947)은 전통적인 부녀자로, 일본 유학 중에 어머니 명으로 잠시 귀국하여 결혼했다. 루쉰과 주안은 일생동안 이름만 부부였다. 삼미서옥(三味書屋)은 루신이 남경으로 떠나기 전까지 12살(1892)부터 17살(1897)까지 공부한 서당이다. 함형주점(咸亨酒店)은 소설 「쿵 이지」, 「내일」의 배경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어두운 그의 소설은 어린 시절 겪었던 고향의 이미지로, 당대 중국의 현실이었다.
가난했던 루쉰은 난징 시절,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며 학비를 받지 않고 생활보조금을 주는 장난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 광로학당(礦路學堂)에 다녔다. 1902년 3월, 그는 양강 총독 류 쿤이가 파견한 일본유학생 5명에 뽑혔다. 1909년 8월 일본에서 돌아와 항저우 저장 양급사범학당의 교사가 되었다. 권위주의적 교장과의 투쟁에서 이겼지만 그는 2개월 남짓한 학교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루쉰의 일본 유학은 1902년에서 1909년까지 7년간이었다. 센다이(仙臺) 의학전문학교(1904. 9 - 1906. 3) 시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쿄에서 보냈다. 그 시절 중국 혁명의 중추적 단체였던 민보사(民報社)가 발간하는 신문 민보(民報, 1905. 11. 26. 창간)가 중국 청년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루쉰은 센다이의전 2년을 다니던 중 일명 ‘환등기 사건’으로 문학을 하기로 마음먹고 의전을 자퇴했다.
수업의 남는 시간에 일본정부 홍보물을 환등기로 보여주었다. 러시아군의 스파이로 지목된 중국인이 일본군에게 참수당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군중은 중국인이었다. 루쉰은 이 장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노예근성에 찌든 민중의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서는 문예가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도쿄로 돌아와 문필활동을 하면서 독일 유학을 계획했으나 무망해지자 7년 여의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루쉰의 센다이 의전생활은 1년6개월에 불과하지만 루쉰 정신의 발상지․출발점이었다.
루쉰이 베이징(北京)에 온 것은 그의 나이 32세 되던 해, 1912년 5월이었다. 차이 위안페이(蔡元培)의 추천으로 교육부에 근무하면서 정부의 이전으로 베이징으로 이사했다. 그는 1919년까지 사오싱회관(S회관)에 거주하면서 문학혁명운동의 메카 《신청년》에 대표작 「광인일기」를 발표했다. 바다오완(八道灣)의 집에서 명저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을 집필했다. 베이징여자사범대학에 출강하면서 평생의 동반자였던 ‘여사대 학생운동’ 대표였던 쉬 광핑과 인연을 맺었다.
3․18참살 사건으로 수배자 명단에 오른 루 쉰은 쉬 광핑과 함께 남방행을 결행했다. 1926. 9. 4. 푸젠성(福建省) 남해안 항구도시 샤먼(廈門)에 도착한 그는 샤먼대학과 광저우 중산(中山) 대학에서 강의했다. 1927. 9. 23.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떠났다. 상하이(上海)는 루쉰 문학의 마지막 귀착지였다. 1930년 3월 결성된 좌익작가연맹은 루쉰을 주석단에 선출했다. 그는 복잡하고 논란이 분분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상당량의 잡문(75%를 차지하는 )을 쓸 수밖에 없었다. 1936. 19. 29.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루쉰은 중국 자립의 초석을 철저한 자주정신을 가진 계몽가에 의한 중국인들의 정신개조로 보았다. 그는 당시 서양문명의 형식만을 쫓는 ‘서구문명론자’들을 질타했다. 그들은 모든 중국적 가치 관념을 송두리째 던져버리고 서구의 문명을 맹목적으로 따랐을 뿐이다. 루쉰의 지론은 중국인들의 정신을 계몽하고 계발하는데 있었다. 마지막은 루쉰정신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의 고시古詩에 나오는 말이다.
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
대중의 비난은 사나운 눈으로 차갑게 대하고, 머리를 숙여 달게 아이들의 소가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