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가난이 사는 집

대빈창 2023. 8. 31. 07:00

 

책이름 : 가난이 사는 집

지은이 : 김수현

펴낸곳 : 오월의봄

 

반빈곤활동가 김윤영의 자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함께 싸우며 쌓아올린 기록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후마니타스, 2022), 인류학자가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중국의 전형적 빈민지대(달동네, 공장지대, 슬럼가)를 현장․연구하여 빈곤 과정을 기록한 조문영의 『빈곤 과정』(글항아리, 2002)에 이어 세 번째 잡은 『가난이 사는 집』(2022)은 판자촌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집의 역사를 추적했다.

빈곤에 관한 세 권의 책에서 낯이 익은 유일한 저자였다. 책날개의 이력을 살폈다.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서울연구원 원장으로 노무현․문재인 정부에 참여했다. ‘지붕은 붉은색 페인트를 칠한 시멘트기와, 벽과 담은 시멘트 블록’으로 집안은 목재상에서 가져 온 각목과 헌 문짝, 베니어판 등 닥치는 대로 이용했다. 우리나라의 판자촌은 서구의 범죄소굴 빈민가와 달리 모두 희망을 간직한slum of hope였다.

서울의 급속한 도시화․산업화는 1960년 244만명, 65년 347만명, 70년 543만 명으로 10년 만에 배 이상 인구가 늘었다. 판자촌은 농촌에서 올라 온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 탈출의 근거지로 고향 사람, 친척들끼리 한 동네에 살면서 건설노동, 가내 부업을 함께 하는 경제공동체였다. 부모가 일터로 나가면 아이들을 골목길 할머니들이 돌봐 주었다. 팍팍한 서울살이를 헤쳐 나갈 수 있게 한 복지공동체이자 도시 속의 농촌으로 직업소개소, 직업훈련원, 신용협동조합, 어린이집, 유치원 그리고 심리상담소이기도 했다.

서울의 판자촌 철거 역사는 도심 재개발의 역사였다. 한때 서울 시민의 40%, 1980년대 초반까지 10% 이상이 판자촌에 살았다. 1983년 시작된 전두환 정권의 합동재개발사업이라는 폭력적인 철거로 순식간에 아파트로 변했다. 10년 만에 2-3%로 판자촌은 줄었다. 철거민들의 10%도 아파트에 입주하지 못했다. 세입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70만 명 이상이 판자촌을 떠나야만 했다. 공공임대주택(서울 외곽)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판자촌에서 쫓겨난 이들은 가장 싼 주거지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지하셋방, 쪽방, 고시원, 수도권 다세대, 다가구 주택으로 흩어졌다. 가난이 사는 집은 모양을 달리하여 계속 이어졌다.

저자는 말했다. “판자촌은 거주자들에게만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낮은 인건비로 노동력을 확보해햐 하는 한국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판자촌은 우리나라 초기 경제성장에 필수적이었던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 확보를 가능하게 해준 핵심 수단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은 판자촌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故 리영희(1929-2010) 선생은 판자촌 화재 기사를 무심코 읽다 칼럼 「0.17평의 삶」을 쓰셨다. “모두 1백9채의 집이 잿더미로 변했다는데, 그 총면적이 겨우 2백40평에 불과했고, 그 대지 위에 1천3백81명이 살았으니 한 사람 당 평균 쳐서 0.17평만 허용”되었을 뿐이다. 전태일 열사가 청계천에서 분신했을 때 주소는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였다. 남산동 판자촌 화재로 열사의 가족은 미아동 일대로 집단이주했다. 화재의 충격으로 이소선 어머니는 시력을 잃을 정도로 몸이 아프셨다. 청년 전태일은 도봉산 공동묘지 근처에 직접 판자로 집을 짓고 이사했다.

산동네는 산등성이나 비탈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판자촌으로 달동네로 불리기도 했다. 내가 어릴 적 경험한 달동네는 두 곳이었다. 70년대 약수동에 사시던 작은아버지 댁에 갈 적마다 길눈 어두운 나는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길을 잃었다. 5명의 가족이 방 두 칸에서 부대꼈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나마 숙부 댁은 수도와 변소가 있었다.  수색동의 이모댁은 형편이 아주 어려웠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공중변소 앞의 줄 선 사람들을 보며 어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은 사람 눈이 뜨이지 않으면 바로 엉덩이를 깔 수 있었다.

나의 생에서 영화 〈기생충〉의 기택이네 가족이 살던 반지하방 시절이 두 번 있었다. 89년도 안산공단의 공장노동자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뎠을 때, 고잔동의 화랑빌라 반지하방이었다. 반지하방은 분단국가가 낳은 유물이었다. 유사시에 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해 연립주택, 아파트 지하에 들어선 창고나 보일러실을 개조한 것이 지하방이었다. 두 번째 지하방은 서울 개봉역인근 삼환빌라의 룸펜 시절이었다. 인력시장에서 몸을 파는 노가다 잡부로 삼복더위에 땀으로 목욕을 하고 지하방으로 돌아왔다. 그때 자동모터가 가동되면서 화장실 변기가 오바이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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