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내가 사랑하는 사람
지은이 : 정호승
펴낸곳 : 비채
3주 만의 강화도 발걸음이었다. 대여도서 반납기한의 마감일이다. 신생 도서관 《지혜의숲》부터 들렀다. 한 번 발걸음을 할 때마다 두 군데의 도서관에서 여덟․아홉 권의 책을 빌렸다. 대여도서 목록에 항상 한두 권의 시집이 올라있었다. 표지그림 시인의 컷이 트레이드마크인 시선을 염두에 두었다. 그새 누군가의 손을 탔다. 시집 코너에서 발길을 돌리는데 낯익은 표제가 눈에 띄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정호승(鄭浩承, 1950- )의 시력詩歷 50주년을 기념하는 시선집이었다. 시인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로 문단에 나왔다. 그동안 펴낸 『슬픔이 기쁨에게』(1979), 『서울의 예수』(1982), 『새벽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이 짧은 시간 동안』(2004), 『포옹』(2007), 『밥값』(2010), 『여행』(2013),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2017), 『당신을 찾아서』(2020) 까지 모두 13권의 시집에서 자선自選한 275편의 시가 발표순으로 실렸다.
∣시인의 말∣의 마지막 연이다. - 시집에도 슬픈 운명이 있어 '김영사 비채'에서 다시 개정증보판을 내는 기쁨은 크다. - 책장의 시집코너를 살폈다.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2003)의 개정증보판이었다. 130편 이상의 시가 교체되거나 새로 실린 시선집은 부피가 두꺼웠다. 같은 제목의 「새벽편지」 3편, 「부치지 않은 편지」 2편, 「허허바다」 2편, 「달팽이」 2편, 「새 똥」 2편이 연이어 실렸다. 나는 시편을 읽어나가다 이곳에서 호흡을 멈추었다. 「꽃다발」에서 87. 6. 연세대생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망을. 「어느 어머니의 편지」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을. 「임진강에서」 1987. 1.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은 박종철을.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에서 2014. 4. 16. 세월호 참사를.
해설은 두 편이 실렸다. 시인 김승희는 「참혹한 맑음과 ‘첨성대’의 시학」에서 ‘당선작 〈첨성대〉이후 50년 동안 한결같은 시를 써왔고 한결같이 슬픈 것에 대해 슬퍼하고 고결하고 맑은 것(417쪽)’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이숭원은 「현실의 부정에서 사랑의 화합으로―정호승의 시 세계」에서 ‘50년 전의 시에서 말했던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되풀이하여 노래했다. 그 노래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속될 것’(463-64쪽)이다. 시인의 열네번째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가 새로 출간되었다. 마지막은 시선집을 여는 첫 시 「슬픔이 기쁨에게」(20쪽)의 부분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