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어떻게 죽을 것인가
지은이 : 아툴 가완디
옮긴이 : 김희정
펴낸곳 : 부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포스팅한 시각, 나는 어머니와 섬에 들어오는 아침 배를 타고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현재, 어머니는 파킨슨병 진단 뇌 CT 촬영과 꽈리처럼 부푼 뇌의 굵은 혈관 이상에 대한 신경외과 의사의 진찰이 예약되었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촬영과 진료를 마치면 섬으로 향하는 막배가 떨어졌다. 읍내에서 숙식을 하고 이른 아침에 섬에 들어올 것이다. 위성도시의 대학병원을 어머니는 7-8년째 다니셨다.
어머니는 올해 우리 나이로 91세다. 그동안 척추협착증, 고관절 수술을 잘 이겨내셨다. 천식으로 일주일 간 입원하셨고, 몸을 움직이지 못해 두 번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남들이 흉본다. 죽을 날이 가까운 노인네가 병원 출입이 너무 잦다고.”
나는 간신히 설득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어머니는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걷는데 힘겨워하셨다. 밖에서는 어렵게 보행보조기로 이동을 했고, 실내에서는 워커로 움직이셨다. 팔놀림은 여전하셔서 이웃 두 집의 고추손질을 도와주셨다. 어머니는 7년 전 고관절 수술 후 어렵게 깨어나셨다. 퇴원을 앞두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3년만 더 살면 여한이 없겠다. 너희들이 너무 잘해서 호강에 겨워 죽기가 아깝구나.”
올 초여름, 두 번째 응급실에 실려 갔다, 집으로 향하면서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막내야, 요양원은 들어가기 싫다. 집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15년 전 우리 모자가 서해의 작은 외딴 섬에 삶터를 꾸렸을 때, 집집마다 한두 분의 노인네가 계셨다. 그분들이 전부 돌아가셨다. 어머니보다 두 살 위의 아랫집 할머니 한 분만이 보조보행기를 밀며 고개를 올라오셨다. 동네의 유일한 말동무인 두 분은 하루에도 서너 번 언덕 소나무 그늘아래 만나, 서로 귀가 어두워 높은 언성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의사 아툴 가완디(Atul Gawande, 1965- )는 무의미하고 고통스런 연명 치료에 매달리기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돌아보라고 얘기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중세까지 고작 30세였다. 오늘날 의학과 공중보건의 발달로 선진국의 수명은 80세를 넘어섰다. 현대의학은 생명 연장의 실현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원제는 ‘Being Mortal'이다.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다. 현대의학과 보건은 독립적인 삶을 살 수없는 이들에게 두 가지 방식을 제공했다. 요양원 수용과 끊임없는 수술이다. 그리고 수명을 몇 개월에서 1-2년 정도 연장시켰다. 저자는 회의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무엇을 위해 끔찍하고 고통스런 의학적 싸움을 계속 벌여야만 하는가. 그렇다. 저자는 독자에게 얘기했다. “죽음 자체는 결코 아름다운 게 아니지만, 인간답게 죽어갈 방법이 있다.”
인공호흡기, 영양공급관, 심폐소생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 많은 사람들이 얼마 안남은 삶을 처절하게 연장시키면서 죽음을 맞았다. 온 몸은 수술로 망가졌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어머니가 인공호흡기, 온갖 연명기기로 몸을 휘감은 누이를 보고 울부짖었다.
“내 딸이 왜 여기 누워있냐”
딸을 먼저 보내고 어머니는 서서히 몸이 무너지셨다. 누이를 묻고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지역 국민건강보험 사무실을 찾았다. 우리 모자는 함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