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Alan Weisman)이 2007년에 출간한 『인간 없는 세상』은 인간이 지구에 끼치는 해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그로 인해 후손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있는지를 경고했다. 저자는 한국의 환경운동연합팀과 함께 DMZ를 방문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천만하던 곳은 사라질 뻔했던 야생동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반달가슴곰, 스라소니, 사향노루, 고라니, 담비, 멸종 위기의 산양, 거의 사라졌던 아무르표범이 매우 제한된 이곳의 환경에 의지해 산다.’(260쪽) 길이 241㎞, 폭 4㎞의 구역은 1953년 9월 6일부터 인간 없는 세상이 되었다. 한국의 비무장지대다. 인간들이 없어지자 동족상잔의 지옥이 야생동물들이 가득한 곳으로 변했다.
NLL(Northern Limit Line)은 북방한계선이다. 1953년 정전 협정 당시, 육상에서는 군사 분계선이 설정되었지만, 해상의 경우에는 따로 협의되지 않았다. 유엔군 사령관이 해상 경계선을 의미하는 북방한계선을 정하였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져 오고 있다. 서도西島의 사람 사는 섬은 주문도, 아차도, 볼음도, 말도 4개 섬이다. 볼음도는 민통선 지역이고, 말도는 NLL 선상에 위치했다. 북한과 인접한 서해의 작은 섬들은 농사지을 사람이 점점 줄면서 멧돼지, 고라니, 까마귀, 까치가 극성을 부렸다.
지난 주말은 어린이날로 시작되는 3일 연휴였다. 연휴 첫날 궂은 날씨에도 다행히 첫 배가 떴다. 도회지의 자식들이 부모 일손을 돕기 위해 섬을 찾았다. 집집 마당과 길가마다 승용차가 가득했다. 고추, 고구마 이식의 적기였다. 하필이면 그동안 참고 참았던 하늘이 비를 내리셨다. 이틀 밤낮으로 75mm를 퍼부었다. 무논에 허옇게 물이 괴었고, 밭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진흙수렁으로 변했다. 집집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빈대떡과 파전을 부쳐 술잔을 기울였다. 연휴 마지막 날, 사리 때의 썰물처럼 섬을 찾았던 자식들은 도회지로 돌아갔다. 할 수 없었다. 노인네들은 날을 길게 늘여 며칠이고 고추와 고구마를 심을 것이다. 고추와 고구마는 섬에서 돈을 만질 수 있는 유이한 환금작물이었다.
위 이미지는 느리마을에서 대빈창 해변으로 향하는 나의 산책로인 봉구산 옛길이다.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길 위아래는 밭들이 자리 잡았다. 그 시절, 집집마다 토박이 노인네들이 봉구산자락 밭을 일구셨다. 그분들이 하나둘 돌아가시면서 묵정밭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주문도에 터를 잡은 지 어언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돌아가신 분들을 두 손가락으로 꼽기에 부족했다. 섬 사람들은 대부분 여든을 넘기시고 제 명에 돌아가셨다. 서해의 작은 외딴섬들은 아기울음 소리가 그친지 언제 적인지 기억에도 없다. 비맛을 본 묵정밭의 왠수같은 잡풀은 살판났다는 듯 더욱 키를 늘일 것이다. 주문도의 밭농사는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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