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대빈창 2023. 9. 18. 07:00

 

책이름 :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지은이 : 정희진

펴낸곳 : 교양인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가 출간되었다. 총 5권의 〈정희진 글쓰기〉 시리즈가 완간되었다. 시리즈 표지그림 콘셉트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여자였다. 1・2권은 샐리 로젠바움의 백인 중년여성과 소녀가 원탁에 앉아 글을 쓰고, 3권은 에드워드 고든의 긴 사각 나무 테이블에 앉은 금발여성이 책을 읽으며 스마트폰을 검색하고, 5권은 니트 악슬렙의 나무 울타리 앞 벤치에 앉은 뒷모습의 여성이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펜을 오른손에 치켜들었다. 나에게 모두 낯선 현대 화가의 생경한 그림이었다.

시리즈 5권은 4장에 나뉘어 29편의 글이 실렸다. 책은 독창적인 글쓰기를 위한 방법론으로 융합 글쓰기를 제시했다. 1장 「생각대로 살지 않으려면」은 융합적 사고를 위한 우리의 자세에 대한 글을 담았다. 니어링 부부는 매일매일을 확신하는 삶이 아닌 모색하는, 저항하는 삶을 살아갔다. 통섭(또는 융합)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이 만나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사고방식. 융합은 타 학문과 대화하면서 지식을 확장하거나 공통점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 지식의 필요성과 쓸모와 가치에 관해 질문하고 논쟁하는 일이다. 나의 위치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성별, 계급, 인종, 지역 등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 속에서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2장 「파국의 시대, 공부란 무엇인가」는 융합적 사고의 공부에 대한 글들을 모았다. 한글 덕분에 한국의 문맹률은 1% 이하로 세계 최고의 글자 해독 국가이지만 문해력은 OECD 국가 중 최하위 또는 중간 이하다. 잘 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염원이 여전한 한국사회에서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한가한 주제로 인식된다. 발전주의는 부국강병주의, 즉 국가나 공동체 간의 힘의 경쟁을 부추겨 강자들끼리 경쟁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와 자연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미국국립과학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06년까지 계열불문하고 미국박사 취득자의 출신학부 1위가 서울대다. 한국은 미연방 대접을 받지 못할 뿐 미국의 한 주州였다. 새로운 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를 시도하는 글, 논쟁적인 글들을 쓰는 이들에게 표절문화는 절망적이다. 한국 지식사회는 절도문화가 당당한 새로운 중세가 도래했다.

3장 「다른 것을 다르게 보기」는 다양한 것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다루었다. 융합의 가장 적합한 번역은 횡단(橫/斷)의 정치(trans/versal politics)로 횡단의 정치는 사고를 교차하거나 기존 의미의 문지방을 넘어(횡단해) 사회변화(trans/formation)를 추구한다. 소통불가능한 구조의 핵심은 말하는 사람마다 젠더, 계급, 인종 등 사회적 위치가 다르다는 점이다. 식민지배와 분단으로 정상적인 근대성을 경험하지 못한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는 구분되지 않고, 다만 ‘정상국가’ 건설 방법에 이견이 있을 뿐이다. 한국은 계급이 교육, 부동산 문제와 얽혀 빈부격차, 양극화로 나타나고 이제 건강과 노화도 계급에 따라 좌우된다.

4장 「고정된 프레임을 넘어서」는 대상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선을 허무는 방법에 관한 글들이었다. 기본소득은 지구의 일원이자 환경의 일부로서 누구나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와 같으며 지구 전체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위한 생명 자체의 권리이다. 동성애 인권 운동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성애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지 못했고, 장애인의 상대어는 ‘정상인’이 아나라 비장애인으로, 기준이 되었던 개념이 사라지면 새로운 지식이 출현한다. 부동산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는 집이 교환가치를 넘어 재산 증식수단이 되었다. 집은 누구에게나 평생 임대 개념의 주거공간이 되어야 한다.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처럼 여겨져서 투쟁해서 쟁취할 필요가 없는 반면, 약자의 주관성은 피해의식과 지나친 요구로 여겨진다.

나는 지금까지 평화학 연구자․여성학자 정희진(1967- )의 공저를 제외한 10권의 책을 모두 잡았다. 서평, 영화평론, 시사평론, 가정폭력, 페미니즘에 관한 글들이었다. 첫 책 『페미니즘의 도전』을 만난 지 어언 7-8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성학자의 책을 초지일관(?) 펴내는 출판사 《교양인》이 고마웠다. 나에게 당대의 가장 독특하고 강렬한 글쓰기의 주체였다. 작가는 30대의 몇 년간을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다고 한다. 자발적 백수로서 나는 하루를 온전히 책속에 묻혀 지내는 삶을 두해 째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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