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대빈창 2023. 9. 22. 07:00

 

책이름 :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지은이 : 백무산

펴낸곳 : 창비

 

‘열번째 시집이다. 여전히 나는 첫 시집을 내던 그곳과 다름없는 공간에 머물러 있다.’ ∣시인의 말∣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나의 시인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보상받을지도 모르겠다.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1988),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1990), 『인간의 시간』(1996). 내가 잡은 시인의 책들은 80년대 말․90년대 초의 세권의 시집이었다.

시인은 1984년 무크지 『민중시』를 통해 등단한 이래,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대변한 노동자 시인이었다. 그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한 울산 대공장의 노동자였다. 그 시절 안산공단의 공장노동자였던 나는, 그의 시집을 잡으며 노동해방을 꿈꾸었다. 이후 그의 詩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 생태문제의 심화로 시세계의 폭을 넓혀왔다.

도문나루터에서 회령으로 향하는 강물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긴 시인은 자신의 폐허를 ‘열여덟살 아버지가 / 그때 두만강을 건너지 못한 탓이라고 / 회령 나루터에서 일경에 체포되면서’(「회령」, 12-13쪽). 시인은 투표장에 어쩌다 가는데 ‘여태 내가 표를 준 사람 가운데 / 대통령이 된 인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국회의원, 시장, 군수, 구청장된 인간도, 대통령 후보 가운데 득표율 오 프로도 넘기지 못했다. 시인의 투표성향은 분명 민중후보와 계급정당에 표를 던졌다. 87년 나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이래, 내가 표를 던진 후보와 정확히 일치했다. 죽을 때까지 나의 투표 원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표제는 「겨울비」(48-49쪽)의 마지막 연에서 따왔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겨울비 온다

어깨에 머리에 찬비 내린다 배가 고파온다

이제 나도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시집은 4부에 나뉘어 57편이 실렸고, 해설은 문학평론가 고영직의 「‘저 너머’를 투시하는 ‘정지의 힘’」으로 “백무산은 근대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제도 전반(민주주의를 포함하여)을 철저히 심문하고 탄핵”(123쪽)하고자 했다. 마지막은 「드론」(100쪽)의 전문이다.

 

몸을 떠난 눈 // 지평선이 사라졌다 // 키의 시선이 사라졌다 // 풍경의 과잉 // 시공은 분리된다 // 수직으로 꽂히는 지배자의 시선 // 흙냄새가 사라진 풍경 // 저 너머가 사라졌다 // 지구는 다시 평면으로 정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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