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올드걸의 시집
지은이 : 은유
펴낸곳 : 서해문집
3주간 군립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할 때마다 시집 한 권을 포함시켰다. 신생도서관 《지혜의숲》 검색창에 ‘시집’을 때렸다. 저자가 생경하다. 은유. 분명 필명일 것이다. 문학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비겨서 표현하는 은유법隱喩法이 먼저 떠올랐다. 작가의 본명은 김지영이다. 10여 권의 에세이, 인터뷰, 르포르타주 등 논픽션을 주로 쓴 중견작가였다.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활동가였다.
작가는 여상을 나와 증권회사에 다니면서 글쓰기를 독학으로 배웠다. 20대는 증권회사 노조 소식지에, 30대는 기업 잡지에 글을 실었다. 결혼하고 애를 키우면서 서른다섯 살의 경력단절 여성은 집필노동자의 길로 나섰다. 증권회사 노조소식지를 같이 만들던 동료가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올드걸의 시집』(청어람미디어, 2012)은 작가의 글이 첫 활자화된 책이었다. 개인 블로그에 생활에서 자라나는 감정에 시를 덧대어 한편 두편 글을 올렸다. 운좋게 출판사와 인연이 닿아 첫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내가 잡은 책은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된 책을 5년 만에 다시 펴낸 책이었다.
詩는 결혼․육아․가사노동과 맞닥뜨리는 불가해한 고통에서 그녀를 구원해 주었다. 아내․엄마․집필노동자로 살며 겪는 절망들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올드걸(나이든 소녀)을 돈․권력․자식에 휘둘리지 않고 회의하는 주체로 설 수 있게 했다. 카피는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였다. 3부에 나뉘어 50꼭지의 글이 실렸고, 마흔 여덟 편의 글이 인용되었다. 인용된 우리나라 시인의 詩는 첫 꼭지 장석남의 「옛 노트에서」를 비롯한 44편, 두보杜甫의 한시漢詩 「곡강이수曲江二首」,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 루쉰魯迅의 산문 「아이들에게」, 문태준의 시집 『가재미』의 뒷표지 글이 실렸다. 서른아홉번째 꼭지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에 인용된 함민복의 詩 「긍정적인 밥」(225쪽)의 전문이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 국밥이 한 그릇인데 /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 시집이 한 권 팔리면 /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 박리다 싶다가도 /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전업주부를 글 쓰기 전선에 이끈 옛 동료는 말했다. “은유의 훌륭한 점은 1인 활동가라는 거예요. 조직도 없지만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항상 가요. 삼성 반도체 반올림 투쟁할 때도, 김진숙 지도위원이 싸울 때도, 저기 먼 지방의 교육현장에도 은유는 달려갔어요. 조직 방침을 가지고 한 말들은 반향을 못 일으켜요. 은유의 글은 응원이 되고 깃발이 됐어요. 사람들이 참여하게 했고요. 고맙고 소중한 존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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