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겹겹의 공간들

대빈창 2023. 10. 26. 07:00

 

책이름 : 겹겹의 공간들

지은이 : 최윤필

펴낸곳 : 을유문화사

 

『가만한 당신』에 이어 〈한국일보〉기자 최윤필(1967- )의 두 번째 잡은 책이다. 연재된 글을 모은 『겹겹의 공간들』은 공간의 풍경을 살피고 그 내면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단조롭고 무료한 공간을 낯설고 생기 있게 만들었다. 문화사학자 스티브 건은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1880-1918)』의 서문에서 “인간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저마다 상이한 공간적 경험을 하며, 의식적이든 무의적이든 공간에 대한 관념을 갖게 마련이다.”라고 했다.

부제가 ‘익숙한 공간에 대한 인문적 시선’으로, 1부 ‘여기’는 생활공간처럼 흔히 접하는 곳 12꼭지, 2부 ‘저기’는 좀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수 있는 곳 11꼭지, 3부 ‘거기’는 추상적이거나 꺼려지는 공간 10꼭지로 구성되었다. 나의 리뷰는 서해의 작은 외딴섬에서 바라보는 공간과 경험을 짧게 그렸다.

내 방 창문을 열면 하루 두 번 바닷물이 쓸고 미는 풍경의 쇼윈도. 변소 푸세식에서 섬으로 이사 오니 좌변식, 오랫동안 산속 야외 화장실. 20대 후반 낮술 힘에 서점 문턱을 넘었다가 무크지 ‘녹두꽃’이 눈에 뜨이면서 활자중독자. 연극무대는 전무, 5년여 전 연인과의 데이트 경기북부 소도시의 영화극장 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고교졸업 후 입에 댄 담배는 하루 두 갑으로 입에 물고 살던 골초 14년 전 금연, 흡연실 없는 섬. 작은 외딴섬에서 커피숍을 찾는 섬에 여행 온 외지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선창의 아이스 아메리카, 생맥주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편의점. 90년도 첫 해, 막내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가시면서 어머니는 지하철 티켓을 손에 쥐고 계셨다. ‘차장이 오길 바라면서’. 섬사람들은 뭍으로 나가는 도선을 타야 밟을 수 있는 계단. 섬의 피트니스센터는 그런대로 운동기구들이 구비된 주민자치센터 건강관리실은 파리만 날리고. 집집마다 포터나 경운기가 대신하는 작은 외딴섬은 택시는커녕 대중교통도 없다.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한 건물에 교실이 나란한 주문도의 유일한 학교는 학생보다 선생이 더 많다.

찌가 움직여 끌어올렸더니 자전거 짐차가 딸려 나온 젊은 시절 한때의 지방 소도시 낚시터. 2년여가 되어가는 자발적 백수 생활, 나의 텃밭은 작업실. 87년 국민대항쟁 시위, 90년대 중반 답사를 떠나던 출발지 서울역. 문상을 갔다 새벽녘 기차를 기다리며 잠깐 눈을 붙인 유일한 경험 찜질방. 80년대 초반 돼지꿈을 꾸고 인천 부평역까지 나가 산 주택복권 석장은 꼴등도 안 맞은 기억이 나의 유일한 로또방에 대한 추억. 2003년 태국 배낭자유여행이 나의 인생에서 경험한 유일한 인천국제공항. 하루 세 번의 산책에서 마주치는 주문도 대빈창 해변 캠핑장 야영객. 누이가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뜨고, 2년 주기로 찾는 국립암센터 건강검진센터. 서도에서 가장 높은 해발 146m의 봉구산 이 우리집 뒷산. 90년대 초반 가리봉 벌통방 시절, 노동자대학 후배와 함께 갔던 서울대 관악 캠퍼스. 나는 의자가 상징하는 계급성을 의도적으로 내팽개친 삶을 추구.

심야전기보일러가 깔려 있지만 아궁이가 살아있는 어머니 온돌방. 내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외딴방의 무연사無緣死. 나는 2년 주기로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참배하지만 국립묘지는 기피. 유년시절 한들고개 언덕 꼭대기 초가집의 겨울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 왼다리 경골 골절․안와 골절․십자인대 파열로 전신마취당한 채 종합병원 수술실에 누운 나. 서울․영등포․청주 구치소 접견실에서 마주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동지들. 공장노동자와 노가다 잡부 시절의 안산 고잔동, 서울 개포동 지하방살이.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 1991년 겨울 명동성당 입구계단의 일주일간 농성장 생활. 15년을 살아온 주문도에서 나의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공간은 봉구산 정상, 앞장술 배수갑문, 살꾸지 선창. ‘언제나, 지나온 길의 끝자락이면서 나아가야 할 길의 첫 자리’(268쪽)의 지금, 여기.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르는 편의점, 커피숍, 지하철, 서울역, 극장, 공항, 로또방 등을 비장소(non-place)라고 분류했다. 똑같은 풍경, 유사한 표정을 가진 이들 장소는 잠시 거쳐 가는 곳일 뿐이므로 진정한 교류나 역사, 문화가 축적되지 않는다. 이런 비장소들은 현대에 나날이 늘어나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나의 삶, 서해 작은 외딴섬은 비장소가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문사의 비밀  (1) 2023.10.30
진화한 마음  (0) 2023.10.27
슬픔의 방문  (1) 2023.10.25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9) 2023.10.24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0) 202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