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법문사의 비밀
지은이 : 웨난․상청융
옮긴이 : 유소영․심규호
펴낸곳 : 일빛
책술에 뽀얗게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펼친 책은 2000. 8. 15. 초판이었다. 책술의 푸른 스탬프는 알파벳 C를 삼각형이 감쌌다. 강화도 유일의 책방 《청운서림》의 마크였다. 그 시절, 나는 시간만 나면 답사여행을 떠났다. 읽을거리에 목말라있던 나에게, 우연히 눈에 띤 책이었다. 742쪽의 양장본은 두꺼웠다. 겉표지를 벗기자 표제아래, 금박글씨로 ‘萬世法門’이라고 부제를 박았다.
『법문사의 비밀』은 법문사 발굴 다큐멘터리였다. 발굴 유물에 대한 세세한 기물 묘사, 불교의 유입․발전과 역대 왕조의 상관, 민중의 신앙심과 갖가지 전설과 야사까지 인문적 지식을 내밀었다. 발굴 유물의 컬러 화보와 각종 자료 사진은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12장에 나뉘어 67꼭지의 글을 담았다. 발문은 법문사 지하궁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베이징 중국 과학 기술원 고고 연구소〉의 스싱방石興那이 썼다.
법문法門은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는 문, 곧 부처의 가르침을 뜻했다. 기원전 485년 2월 15일 부처가 열반했다. 제자들이 남은 재를 수습하자 손가락뼈와 치아 네 개, 두개골 일부와 사리 8만4000개가 남았다. 기원전 240년 석리방釋利方을 비롯한 사문 18명이 19개의 석가모니 진신사리을 담은 보석함을 들고, 긴 세월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며 중국에 들어왔다. 148년 후한後漢 환제 건화2년에 서역 파르티아 고승인 안세고安世高가 중국에 왔다. 안세고는 석리방 일행이 묻은 불사리를 발굴하여, 전국 각지에 불탑과 사원을 세우고 불사리를 안치하게끔 황제께 건의했다.
석가모니 최대사리 지골指骨-손가락뼈 사리는 4층 목탑을 건조, 진신사리보탑眞身舍利寶塔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 안치했다. 사원寺院을 짓고, 아육왕사阿育王寺(후에 법문사)라 했다. 법문사는 당나라 때 황실사원으로 최고,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나라 역사상 일곱 번째 불지사리佛脂舍利 봉영식이 의종 873년에 있었다. 874년 열두살의 황태자 희종은 즉위 후 불사리를 다시 법문사로 보내라는 조서를 내렸다. 법문사 지하궁이 밀봉된 그해, 황소의 난을 시작으로 당나라는 100년 동안 전란에 휩싸였다. 법문사 지하궁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1981년 8월 열흘 이상의 폭우가 퍼부으면서, 명나라(1579-1609년) 때 재건되어 400년 넘게 제자리를 지키던 13층 팔각 석가모니 진신사리탑이 맨 꼭대기부터 절반이 무너졌다. 5년의 세월이 흐른 1987년에 본격적으로 재건이 시작되었다. 8각13층 진신보탑을 보수하며 바닥을 파내던 중 지하궁전으로 통하는 석문石門이 발견되었다. 지하궁에서 길이 113㎝, 너비 48㎝의 진신지문비眞身誌文碑와 2,900여 점의 진귀한 문화재가 발굴되었다.
가장 놀라운 발견은 현재 세계에서 둘도 없는 불교계 지고지상至高至上 성체聖體의 발굴이었다. ①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던 흑칠보함〈은릉녹정단향목〈유금사천왕녹정은함〈녹정은함〈유금여래녹정은함〈육비관음녹정보함〈금광보전진주장보함〈보전진주장무부석녹보함〈보주정단척사문금탑의 탑좌 위에 높이 2.8㎝의 은기둥銀柱 안에 부처님 손가락 사리가 들어있었다. ②철함〈목함〈쌍봉보개유금은관에 불사리가 비단 위에 놓였다. ③철함〈작은 유금은함〈사십오존조상녹정금함 안에 석가모니 사리 한 점이 1000년 이상 액체 속에 잠겨 있었다. ④사포아육왕탑〈보찰단첨동탑〈은관 안에 불사리가 발견되었다.
4점의 손가락 사리 중 3점(①, ②, ④)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모양과 색깔을 똑같이 만든 모조품(영골사리)렸다. 법문사 진신보탑 지하궁에 봉안된 불지사리佛脂舍利 4과에서 세 번째(③)로 발굴된 사리가 부처님 왼손 중지로 판명되었다. 사리들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9대 기적 가운데, 4번째 기적으로 등재되었다.